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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2022.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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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5장 19절 ~ 26절 [개역개정]
19 그 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이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20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 없이 가니 오늘 어찌 너를 우리와 함께 떠돌아다니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21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종도 그 곳에 있겠나이다 하니
22 다윗이 잇대에게 이르되 앞서 건너가라 하매 가드 사람 잇대와 그의 수행자들과 그와 함께 한 아이들이 다 건너가고
23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며 모든 백성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
24 보라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도다
25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26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설교문 보기

누이동생 다말의 일로 암논을 죽인 압살롬은 외조부인 그술 왕 달매에게로 도망을 가서 3년을 머물렀습니다. 그사이 다윗은 죽은 암논에 대한 슬픔은 거의 잊었지만 대신 압살롬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이 사실을 안 요압이 드고아의 한 슬기 있는 여인을 다윗에게 보내어 압살롬의 귀환을 요청케 했고, 이에 다윗이 허락하므로 압살롬은 예루살렘을 떠난 지 3년 만에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다윗은 압살롬을 그의 집에 머물러 있게 하고 자신을 대면치 못하도록 했습니다. 한 마디로 가택연금령을 내린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압살롬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기를 기다린 것이라고 보는가 하면, 왕위 계승 대상에서 압살롬을 제외시킨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또 백성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는데, 이는 압살롬의 범죄에 대해 너무 관대하게 처분했다고 백성들이 불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런 조치를 취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 그런 조치를 취했는지는 몰라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암논의 경우처럼 다윗이 혈육의 정에 이끌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이 흘렀고, 압살롬의 아버지에 대한 불만은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후에 요압의 중재로 다윗과 화해한 압살롬은 반역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지 4년 만에 그것을 실행에 옮겼습니다(15:7). 이런 압살롬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패역무도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패역무도(悖逆無道)'란 '사람으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도리에 어긋나고 순리를 거슬러 사람다운 데가 없다'는 뜻으로(네이버사전), 사울 왕이 다윗에게 협조한 자기의 맏아들 요나단에게 한 표현입니다. 사울은 요나단에게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이라고 했는데(삼상 20:30), 이는 '사악하고 반역적인 여자의 아들' 혹은 '사악한 여자가 불륜으로 낳은 자식'이란 의미로 당시 히브리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욕설 가운데 하나였다고 합니다(라이프성경사전).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요나단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패역무도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아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더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압살롬은 예루살렘에 돌아온 지 2년이 되었지만 그동안 한 번도 다윗 왕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연금상태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다 못한 압살롬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요압을 왕에게 보내려고 그를 데려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사람을 보냈지만 역시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압살롬은 요압의 밭에 불을 지르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요압이 오지 않고는 못 배길 거라 생각한 것입니다. 압살롬은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자숙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다윗에게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만나기 위해 자신을 도와준 요압의 밭에 불을 지르는 악행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은 자기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배은도 마다하지 않는 파렴치하고 악한 자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다윗을 만나 화해하고 자신의 지위를 회복한 압살롬은 반역을 위한 준비를 시작합니다. 먼저 자신을 위해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들을 거느렸습니다. 이는 반역을 위해 필요한 병기와 병력을 갖추는 동시에 자신이 차기 왕권의 계승자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왕상 1:5). 장남인 암논은 죽었고, 둘째인 길르압(다니엘, 대상 3:1)은 성경에 그 이름이 딱 한 번 언급될 정도로 존재감이 미미했습니다. 일찍 죽었든지 아니면 왕위 계승에 관심이 없어서 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는 쥐 죽은 듯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셋째인 자신이 아버지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적자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윗을 이어 왕이 될 자는 압살롬이 아니라 솔로몬이었습니다(대상 22:9, 10). 이에 불만을 가진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왕위를 차지하려 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는 민심을 돌기 위해 성문에서 재판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며 다윗이 백성들의 송사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매도하면서 자신이 왕이 되면 공정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선전했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 반역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한 압살롬은 다윗을 찾아가 한 가지 요청을 했습니다. 자신이 그술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으니 그것을 갚을 수 있게 헤브론으로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거짓말입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곳이며(삼하 3:2, 3),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통치를 시작한 곳인 헤브론에서 왕위에 오를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압살롬은 헤브론으로 가서 정탐꾼들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에게 보내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고 외치도록 했습니다. 그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압살롬과 함께 헤브론으로 갔고, 압살롬을 따르는 무리의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그 세력이 커져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일행과 함께 급히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압살롬이 반역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다윗 못지않게 십계명의 계명들을 어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복수를 위해 암논을 죽임으로 십계명의 여섯 번째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겼습니다. 여기에 다윗을 매도하고 속임으로써 아홉 번째 계명인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겼고, 다른 사람을 속이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함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세 번째 계명도 범했습니다. 거기에 아버지 다윗에게 반기를 듦으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다섯 번째 계명과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함으로 '간음하지 말라'는 일곱 번째 계명까지 어겼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도둑질하지 말라'는 여덟 번째 계명을 범한 셈입니다. 이처럼 패역무도했던 압살롬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삼하 18:9-15).

압살롬의 모반에 가담했던 아히도벨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윗의 모사로 압살롬의 요청에 의해 모반에 가담을 했습니다. 압살롬이 아히도벨을 부른 것은 그가 뛰어난 모사요 지략가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삼하 16:23에 의하면,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만큼 아히도벨의 지략은 뛰어났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삼하 15:31).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인 것은 아히도벨과 같이 지혜로운 사람이 왜 압살롬의 편에 섰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 아히도벨은 하나님이 다윗의 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아히도벨은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한 것일까요?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이 밧세바는 아히도벨의 손녀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밧세바는 엘리암의 딸이고(삼하 11:3), 엘리암은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입니다(삼하 23:34). 다윗의 모사 아히도벨 역시 길로 사람입니다(삼하 15:12). 이 둘이 같은 인물이라면 아히도벨이 다윗을 배반한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됐든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편에 서서 그의 모사가 되었습니다. 압살롬으로 하여금 다윗의 후궁들 즉 첩들과 동침하도록 계략을 세운 것이 바로 아히도벨입니다. 이러한 아히도벨의 모략은 밧세바를 범한 다윗에 대한 징계의 일환으로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이미 예언하신 바 있습니다(삼하 12:11). 그리고 압살롬의 모사로서 아히도벨의 역할은 여기까지였습니다. 그의 또 다른 모략은 묵살되었습니다. 압살롬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을 더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압살롬에게 재앙을 내리시려고 아히도벨의 좋은 계획을 좌절시킨 결과였습니다(삼하 17:14).

아히도벨은 자신의 계략이 묵살되자 고향에 돌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압살롬이 다윗에게 패할 것을 예감했고 그러면 자신은 역모죄로 처형을 당하게 될 것이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은 스승을 배반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룟 유다를 연상케 합니다. 비록 자살의 동기는 다르지만 아히도벨이나 가룟 유다의 죽음은 불의한 자의 말로가 어떤지를 잘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반면에 아히도벨과는 달리 끝까지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가드 사람 잇대입니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자기 동족을 데리고 이스라엘에 망명을 했습니다. 이전에 다윗도 사울을 피해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망명한 적이 있었습니다(삼상 27:2). 다윗의 말대로 잇대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외국인이기 때문에 굳이 다윗을 따를 필요는 없었습니다. 누가 왕이 되든 그를 섬기면 될 일이었습니다. 다윗을 따르면 죽을 수도 있지만 압살롬의 편에 선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동족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잇대는 다윗의 편에 섰습니다. 사나 죽으나 다윗이 어디에 있든지 그와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잇대가 의리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다윗이 실수가 많고 범죄함으로 인해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임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를 알고 있었던 잇대는 그와 함께 하는 것을 후회하지 않았고, 생사를 같이하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외모로만 볼 때 이스라엘에서 가장 출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발 끝부터 정수리까지 흠잡을 데 ㅄ을 정도로 잘 생겼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특히 그의 머리카락은 남달랐습니다. 숱이 많을 뿐만 아니라 빨리 자랐기 때문에 해마다 자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 무게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왕궁에서 사용되는 저울로 이백 세겔, 2Kg이 넘을 정도였습니다(삼하 14:25, 26).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머리털은 힘과 아름다움을 상징했기 때문에 압살롬의 머리숱이 많고 빨리 자랐다는 것은 분명 백성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압살롬은 그 머리카락 때문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가 전쟁에 패하고 노새를 타고 도망할 때 상수리나무 아래로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의 머리가 가지에 걸리는 바람에 공중에 매달리게 되었고 이를 본 요압과 그의 부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삼하 18:9-15).

사울 역시 압살롬처럼 외모가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삼상 9:2). 다윗의 형들 역시 외모에 있어서는 그에 못지않았습니다. 외모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인기를 끌지는 몰라도 하나님께는 관심 밖입니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삼상 16:7). 물론 다윗 역시 잘 생기는 했지만(삼상 16:12, 18)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을 의지했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하나님만 바라보았으며, 죄를 지적받았을 때는 변명하지 않고 인정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징계를 받을 때는 그것을 달게 받았습니다. 시므이가 자신을 저주할 때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삼하 16:10). 그리고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자신에게 행하실 것을 원했습니다(삼하 15:26).

다윗은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왕상 15:5). 비록 다윗은 허물과 실수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사람임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잇대는 이를 알고 있었기에 다윗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친구 후새도, 제사장 사독도 그랬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영적인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어느 편에 서야 할지를 잘 판단해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육신의 안목이 아니나 영적인 안목, 신앙의 눈으로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시 111:10 ; 잠 1:7).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하며,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항상 진리의 편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