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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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9장 1절 ~ 10절 [개역개정]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3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4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
5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6 그가 땅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시니 그 기둥들이 흔들리도다
7 그가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도다
8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9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10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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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만 사람 엘리바스에 이어 수아 사람 빌닷이 욥을 책망하며 권면했습니다. 둘의 논리는 같습니다. 욥이 고난을 받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며,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아야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전제가 잘못되지만 않았어도 상당수가 성경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엘리바스는 4장 8절에서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라고 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라는 것은 보편적 원리이자 자연법칙입니다(갈 6:7).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날 리 없고, 팥을 심었는데 콩이 날 리 만무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던지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또 엘리바스는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욥 1:1). 하나님께서 세상에 욥과 같은 사람이 없다고 하실 정도였습니다(욥 1:8). 그렇다고 욥이 하나님보다 의롭다거나 깨끗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피조물인 인생을 창조주 하나님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의롭다고 한들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고, 아무리 깨끗하다고 한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오점투성이입니다. 그런 인생을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서로 비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비교 불가입니다. 격차가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 격차가 너무 미미하기 때문입니다. 도토리 키 재기라고 들어보셨죠? 재봐야 거기서 거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타락한(시 14:3) 죄인들입니다(롬 3:10). 우상숭배나 동성애는 큰 죄이고,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은 작은 죄입니까? 세상 법정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처벌도 없습니다. 다음 주일인 10월 27일 오후 2시에 광화문 일대에서 ‘악법 저지를 위한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를 갖습니다. 온·오프라인 합쳐서 총 200만 명의 참석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 교단을 비롯해 한국교회총연합 회원 교단들이 대부분 참여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이 집회는 동성혼 합법화와 포괄적 차별금지법 등의 통과를 막고 나라와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한 취지로 계획됐다고 합니다. 차별을 금지하는 건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성적 지향(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금지 조항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동성애를 비판하는 설교나 강의를 하면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창 1:28). 이는 동성(同姓)이 아닌 이성(異性)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룰 때만 가능합니다(창 2:24). 이것이 순리(順理)이며 이를 거스르는 것은 역리(逆理) 곧 죄입니다(롬 1:26). 성경은 동성애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는 것을 일관성 있게 지적하고 있습니다(레 18:22 ; 20:13 ; 삿 19:22, 23 ; 고전 6:9 ; 딤전 1:10 etc.).
그러면 동생애는 큰 죄이고,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은 비교적 작은 죄입니까? 성경은 우상숭배나 동성애, 다른 사람을 속이고 시기하며 질투하는 것 모두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규정하고 있으며(롬 1:32 ; 6:23)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라 경고하고 있습니다(고전 6:10). 따라서 죄의 경중을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어떤 큰 죄를 지은 사람들 때문이 아닌 우리 모두의 죄 때문입니다(사 53:6). 죄가 크든 작든 우리는 모두 죄인이며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죄인인데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마치 눈에 들보가 있는 사람이 눈에 티가 있는 사람에게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마 7:4).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입니다. 정죄를 받지 않으려면 정죄하지 말아야 하고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아야 하며 용서를 받으려면 용서해야 합니다(눅 6:37).
그리고 빌닷은 8장 9절에서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이 괄호로 묶여 있어서 빌닷이 직접 한 말인지 아니면 욥기의 저자가 첨가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의도는 앞 구절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즉 빌닷은 8절에서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우라.”고 했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9절을 첨가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는 말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다’라는 말은 인생이 짧고 덧없음을 표현한 것으로 성경의 일관된 주장이기도 합니다(대상 29:15 ; 시 102:11 ; 144:1). 그림자는 햇빛이 비췰 때만 생겨나는 현상으로 그 생명력은 열두 시간 정도에 불과합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인생을 그보다 더 짧은 ‘안개’에 비유했습니다(약 4:14). 안개는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보통 발생한 지 여섯 시간 이내에 사라집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날은 마치 해가 지면 없어지는 그림자나 해가 뜨면 사라지는 안개와 같이 잠시 잠깐입니다. 그 짧은 시간에 무엇을 배운다 한들 인생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옛 선조들의 경험과 지혜를 배워야 한다는 빌닷의 주장은 일면 타당성이 있습니다. 물론 선조들이라고 해서 인생을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지식이 모두 옳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그들의 경험과 지혜는 후세의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또 빌닷은 8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순전한 사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תָּם)는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상태를 말하며, 1장 1절(1:8 ; 2:3 ; 9:20-22)의 ‘온전하고’로 번역된 단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을 영원토록 지켜 주실 것입니다. 반면에 악한 자들은 붙들어 주지 않으시고 그들을 반드시 끊어버리실 겁니다(시 37:28). 이렇듯 친구들의 주장 중에는 성경에 부합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주장은 욥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했습니다.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욥은 빌닷의 주장에 대해 이렇게 대답합니다.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 9:2) 빌닷의 주장처럼 의인은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지만 악인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욥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주의 눈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도 모르는 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죄를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고난 받고 있는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욥 9:17). 단지 사람이 의로울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 의를 내세울 수 없다는 걸 인정한 것뿐입니다(욥 9:15). 사람이 아무리 지혜롭다고 한들 하나님의 천 마디 질문에 단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습니다(욥 9:3). 실제로 욥은 하나님의 수많은 질문에 한 마디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욥 40:4). 그만큼 하나님은 지혜로우시고 능력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거역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욥 9:4).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기도 하시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들을 옮기기도 하십니다(욥 9:5). 또 땅을 강하게 뒤흔들어 그 기초까지 흔들리게 하십니다(욥 9:6).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해도 뜨지 못하고 별들도 빛을 내지 못합니다(욥 9:7). 그는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큰일들을 하시며, 헤아릴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욥 9:10). 그분께서 가져가시면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고, 왜 그러시냐고 항의할 수도 없습니다(욥 9:12).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신데(욥 1:21) 누가 감히 항변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시면 라합을 돕는 자들도 무릎을 꿇는데, 어떻게 그분과 논쟁할 수 있겠습니까(욥 9:14). ‘라합(רַהַב )’은 고대 히브리인들이 용처럼 바다 괴물로 여기는 것으로(사 51:9),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그 어떤 세력도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욥은 비록 자신이 죄가 없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며 다만 그분께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합니다(욥 9:15).
또 자신이 온전하고 의로울지라도 자기 입이 자기를 정죄할 거라고 했습니다(욥 9:20). 욥은 여전히 자신이 순전하다고 여기지만 이젠 더 이상 하나님께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자신을 죄인으로 단정하셨는데 더 이상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것입니다(욥 9:28-32). 욥은 한시라도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욥 9:34).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욥 9:33). 하나님과 자신 사이를 중재하고 변론해 줄 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여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의로운 인생은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온전하고 정직하게 살았다고 한들 하나님 앞에서는 허물이 많은 죄인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씻어도’(욥 9:30)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해 줄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져야 할 죄악을 대신 짊어지시고(사 53:6)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갈 3:13).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롬 6:23). 이 외에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고, 다른 이름도 없습니다(요 14:6). 예수님은 죄인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여러 길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길이며,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보내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고 구원에 이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딤전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