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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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2장 1절 ~ 14절 [개역개정]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3 나도 너희 같이 생각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4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의롭고 온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5 평안한 자의 마음은 재앙을 멸시하나 재앙이 실족하는 자를 기다리는구나
6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7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8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9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10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11 입이 음식의 맛을 구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간하지 아니하느냐
12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
13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14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아주지 못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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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에 이어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의 말에 반박하고 나섰습니다. 다른 두 친구처럼 소발도 욥의 고난이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욥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라고 주장하니(욥 11:4) 가만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발은 먼저 욥이 말이 많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욥 11:2) 구약에서는 말이 많은 것을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했습니다(전 5:3).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쉽고, 또 죄를 지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잠 10:19). 그러므로 말은 항상 조심하고 또 신중하게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욥의 경우는 정상을 참작해야 합니다. 그가 처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이 말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결코 자기를 자랑하거나 포장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소발의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이어서 소발은 욥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해 버립니다.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욥 11:3) ‘자랑하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바드, בַּד)는 과장이나 허풍, 거짓말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소발은 자신이 무죄하다는 욥의 말을 거짓이나 헛된 말로 간주해 버린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듣고서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게 소발이 반박에 나선 이유입니다.
또 소발은 욥에게 “하나님께서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고 했습니다(욥 11:6). 이는 하나님께서 욥의 죄를 완전히 잊게 해 주셨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죄 가운데서 얼마를 잊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전 성경[개역한글판]에서는 이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라고 번역했습니다. 욥이 지은 죄에 비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이 가볍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는 친구로서 해서는 안될 말입니다. 고통받고 있는 친구에게 위로는 하지 못할망정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사실이 아닌 것을 말입니다. 욥이 고난을 받는 것 그가 지은 죄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욥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적으로 외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죽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에다 대고 ‘네가 지금 받는 고난은 네가 지은 죄에 비하면 오히려 가벼운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상처에 초를 붓는 것이고 불난 데 기름을 붓는 격입니다. 우리는 이런 우를 범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말은 항상 조심하고 또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잘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만일 사람이 말에 실수가 없으면 그는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약 3:2). 하지만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이 말을 항상 올바르게 사용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약 3:8).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다윗은 자기 입에 파수꾼을 세워 주시고, 자기 입술의 문을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시 141:3).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도록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말로 죄를 짓지 않도록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소발의 비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욥 11:12) 이 말은 ‘들나귀도 길들여질 때가 있듯이 미련한 자도 지혜롭게 될 때가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들나귀 곧 야생 나귀를 길들이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 말을 긍정적인 의미가 아닌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즉 ‘미련한 사람이 지혜롭게 되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들나귀가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더 낫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가 지혜롭게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의미로 해석하든 소발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욥이 들나귀처럼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어찌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 수 있으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어떻게 측량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소발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정작 어리석은 것은 욥이 아니라 소발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가 욥에게 “하나님께서 네게 내리시는 벌이 네 죄보다 가볍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욥 11:6)라고 한 것은 큰 오만입니다. 자기 생각을 말하면서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실 거야’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더 큰 교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다릅니다. 사람이 아무리 지혜로워도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 수 없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측량할 수도 없습니다. 이는 소발이 욥에게 한 말인데(욥 11:7), 정작 본인은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이런 사람이 바로 교만하고 어리석은 자입니다. 후에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에게 화를 내셨는데,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욥과 같이 옳게 말하지 않고 어리석게 말했기 때문입니다(욥 42:7).
그렇다고 소발의 말이 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욥 11:9)라고 한 것은 옳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라고 하셨습니다(사 55:9).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람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 헤아릴 수 없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아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욥 11:11)라고 한 말 역시 옳습니다. 여기서 ‘허망한 사람’은 12절의 ‘허망한 사람’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12절의 ‘허망한 사람’은 문맥상 ‘미련한 사람’ 혹은 ‘어리석은 사람’을 말하고, 11절의 ‘허망한 사람’은 ‘거짓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모든 걸 아시는 전지 하신 하나님께서는 누가 진실한 사람이고 누가 거짓된 사람인지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숨길 수 없고 그 어떤 것도 감출 수가 없습니다(딤전 5:2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계실 뿐만 아니라 생각까지도 감찰하고 계십니다(시 139:1-4).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때마다 일마다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은 한편으론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을 늘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친구들처럼 욥의 고난이 죄의 결과라고 생각한 소발은 그에게 어리석은 사람처럼 행동하지 말고 겸손히 회개할 것을 촉구하면서(욥 11:13, 14), 그렇지 않으면 악인들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 경고했습니다(욥 11:20). 하지만 욥은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은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회개하라고 하니 그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욥은 자신을 ‘미련한 들나귀’(욥 11:12)에 비유하며 어리석은 자 취급하는 것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빈정거리는 어투로 “너희만 지혜로운 사람처럼 말하는데, 그 정도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욥 11:2, 3). 그리고 이전엔 자신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곤 하셨는데, 지금은 친구들의 웃음거리와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한탄합니다(욥 12:4). 우리도 욥처럼 세상 사람들이나 가까운 지인들로부터 조롱과 수모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고 견뎌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를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고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본을 보이셨습니다(벧전 2:19-21). 세상 사람들로부터 때론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고 때론 수모를 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것이 아닌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각오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마 16:24 ; 마 7:14). 폭풍 뒤에 평온이 오고, 비가 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이 고난 뒤에 영광이 있습니다(롬 8:18).
이어서 욥은 의롭고 온전한 사람이 조롱거리가 되고, 오히려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이 평안히 살고 있다는 사실을 예로 들면서 자신에게 내린 재앙이 죄 때문이라는 친구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요 12:6).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의인보다 악인이 더 형통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욥 9:24).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상황만을 가지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이에 대해서 욥은 짐승들과 땅에게 물어보면 그것들이 가르쳐 줄 거라고 말합니다(욥 12:7, 8). 여기에는 친구들의 지혜와 지식이 짐승들보다 못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짐승들도 아는 것을 너희는 왜 모르느냐는 것입니다(욥 12:9). 결국 욥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고 또 이루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모든 만물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신 30:15, 16).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죽게도 하시고 살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일으키시고 궁핍한 사람을 들어 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백성을 지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분 안에서만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는 의인이라고 해서 형통하고 악인이라고 해서 고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불평하거나 그들의 형통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그들이 이 세상에서는 잘 되는 것 같지만 언젠가 그들에게도 죽음은 찾아올 것이고 그들이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이 잘 되는 것에 불평하거나 그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이 사는 삶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기준도 다르고 방식도 다릅니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려고 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언 기자의 권면처럼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잠 23:17). 그런 자들에게 참된 소망이 있고 세상이 줄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요 1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