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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2)

yeum 2024. 12. 23. 11:10
성경본문 보기

이사야 61장 1절 ~ 3절 [개역개정]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문 보기

지난 시간에 이어 이 시간에도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 곧 복음을 전하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2. 마음이 상한 자(들)를 고치셨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들이란 심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이런 고통을 겪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성경에서는 주로 죄로 인해 겪는 심적인 고통을 말합니다. 다윗은 이를 ‘상한 심령’이라고 표현했습니다(시 51:17).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가까이하시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를 구원해 주십니다(시 34:18).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질병뿐만 아니라 죄로 인해 상한 심령을 고치시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습니다(시 147:3).

3. 포로 된 된 자(들)에게 자유를, 갇힌 자(들)에게 놓임을 선포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는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눅 4:18b).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한다’라는 말은 히브리 성경에는 없고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LXX)에 나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이 부분이 이사야 61장이 아닌 다른 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사 29:18 ; 35:5 ; 42:7). 이는 당시에 70인역 성경이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증명하기 위해 누가가 첨가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그 예언대로 많은 시각 장애인을 고쳐 주셨습니다(마 15:30 등).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육체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시각 장애인을 비롯해 각종 병자를 고쳐 주셨으나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주된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포로가 되어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해방하시고(계 1:5), 죄의 노예가 되어 세상에 얽매여 사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즉 죄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마 1:21).

4.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는데(눅 4:19), 이는 구약의 희년 제도를 연상케 합니다(레 25:9, 10). 희년은 안식년과 더불어 당시 사회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제도였습니다. 안식년이란 7년마다 토지에 휴식을 주기 위해 정해진 제도로 6년 동안은 농사를 짓고, 6년째 가을부터 이듬해 가을까지 1년 동안 땅을 묵히는 것입니다(레 25:4). 이 안식년 기간에는 씨를 뿌리는 일과 그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일이 금지되었는데,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 관습을 지키고 있습니다. 희년은 칠 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후의 다음 해 즉 오십 년이 되는 때를 말합니다. 이때도 안식년과 같이 땅을 휴경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희년에는 바로 전 안식년에 이어 2년간 땅을 묵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희년에 관한 몇 가지 규례가 더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종으로 팔렸던 자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레위기 25장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희년에 종이 되었던 자들이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은 영적으로 죄의 종이 되었던 자들이 그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게 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종이 되어 고통받고 있는 인류에게 희년 곧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때는 종이 되었던 자들에게는 은혜의 해이지만 그들을 얽매이게 했던 어둠의 세력들에게는 복수 곧 심판의 때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은혜의 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지금도 죄에서 자유를 공포하는 복음의 나팔이 계속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팔 소리가 멈추는 날 곧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끝까지 복음을 거부하고 죄의 종으로 살았던 자들에게는 그날이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5. 슬픈 자(들)를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4). 이는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셨다”라고 한 이사야의 말을 반영한 것입니다. ‘위로하다’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준다’는 뜻입니다. 이를 헬라어로 ‘~곁에서 부르다’라는 뜻의 ‘파라칼레오’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보혜사’로 번역된 ‘파라클레토스’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파라클레토스’는 ‘곁에서 돕기 위해 부름을 받은 자’란 의미로 ‘위로자’ 혹은 ‘대언자’(요일 2:1)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슬픔을 겪습니다. 가장 큰 슬픔은 아마도 죽음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일일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도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슬퍼하며 애통했고(창 23:2), 아버지 야곱이 죽었을 때 요셉도 그랬습니다(창 50:10). 다윗은 친구 요나단이 죽었을 때 몹시 슬퍼하며 마음 아파했습니다(삼하 1:26). 그런데 슬픔에는 육체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죄로 인해 애통해하는 영적인 슬픔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후에 몹시 통곡했습니다(마 26:75). 후에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예수님을 전했을 때(행 5:31),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행 2:37). 찔림을 받았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으로 인해 마치 뾰족한 것에 찔려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그렇게 마음 아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자신들의 죄를 깨달은 사람들이 심한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애통하며 탄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이란 바로 이런 슬픔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슬픔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탄식하는 영적인 슬픔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탄식하는 사람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하여 애통해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실 때 많은 사람이 슬퍼하며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특히 여자들은 그 광경을 보면서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눅 23:28). 이 말씀처럼 그들이 예수님을 위해 울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죄 사함과 영생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작 그들이 슬퍼하고 가슴 아파해야 할 일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게 한 바로 자신의 죄와 그 자녀들의 죄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죄를 회개하라고 선포하는 선지자들을 죽였으며(마 23:37) 급기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죄악으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받아 큰 재난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마 23:38). 실제로 A.D.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했고(마 24:2), 그때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후에도 유대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그들 자신과 자녀를 위해 울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영적인 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고 예수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행 4:12). 또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게 왜 죄가 될까요? 그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죄를 가리키는 용어가 여럿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히브리어 '헤트(חֵטְא)'와 헬라어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입니다. 둘 다 ‘과녁을 벗어나는 것’ 또는 ‘과녁에서 빗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즉 죄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잘못된 길로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라고 했습니다(딤전 2:4). 베드로 역시 같은 의미의 말을 했습니다(벧전 3:9).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는 것, 그것이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행 2:38, 9). 따라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고 그것이 곧 죄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배척하는 것이 바로 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요 16:9).

이렇게 자신의 죄로 인하여 슬퍼하며 애통해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있습니다(사 61:2). 이는 세상이 주는 위로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위로는 일시적이며 불완전하지만, 예수님의 위로하심은 영원하고 완전합니다. 이를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3) 시온이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말하는데, 이곳에서 슬퍼하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즉 자신의 죄로 인해 가슴 아파하며 하나님의 긍휼 하심과 구원을 바라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당시 세리는 이방인 취급을 당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성전 안뜰에는 출입할 수 없었고, 이방인의 뜰이라 불리는 성전 바깥들의 출입만 허용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하늘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할 뿐이었습니다(눅 18:13). 이렇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애통하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고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게 하실 것입니다. 한 마디로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시 30:11).

그러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슬픔은 무엇일까요? 육체적인 슬픔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별은 결국 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롬 6:23). 그리고 죽음으로 인한 슬픔은 잠시뿐입니다. 어차피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건 아닙니다.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 9:27). 인간은 모두 죄인이고 그래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었습니다. 이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슬픔이요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요 3:16).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행 13:39) 영원한 형벌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과 슬픔 그리고 죽음은 모두 죄로 인해 비롯되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로 말미암아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롬 8:2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마 1:21 ; 눅 2:11).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롬 5:18). 비록 이 땅에서는 여전히 고난과 슬픔과 죽임이 계속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더 이상 고난이나 슬픔도 없을 것이고, 아픔이나 죽음도 있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계 21:4). 우리 모두 그날을 소망하며 신앙으로 인한 어떤 고난도 잘 참고 견딜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