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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yeum 2025. 1. 6.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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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8장 1절 ~ 11절 [개역개정]

1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 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6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설교문 보기

아덴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은 고린도로 갔습니다. 고린도는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서 매우 부유한 항구도시였습니다. 그곳의 중심부에는 여신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세워져 있는데, 그곳에 천여 명이나 되는 신전 창기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의 주된 역할은 신전에 오는 사람들과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으로, 당시 대부분의 이방 종교에서 제사 의식의 일부로 행해졌습니다(왕하 23:7). 그만큼 고린도는 다른 어느 도시보다 성적으로, 도덕적으로 매우 문란했는데, 고린도 사람 하면 난봉꾼을 가리킬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아굴라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본도 출신의 유대인으로 얼마 전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이탈리아)에서 왔습니다(행 18:2). 그 이유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모든 유대인에게 로마를 떠나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아굴라 부부는 고린도로 오기 전에 로마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로마에도 교회가 있었는데, 누구에 의해 세워졌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방문했다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로마의 유대인들(행 2:9, 41)에 의해 세워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굴라는 그들 가운데 한 명이었거나 그들로부터 복음을 듣고 기독교로 개종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찾아갔습니다.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혼자였고, 고린도에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곳에 얼마나 머물러 있을지는 모르나 있는 동안에 생계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천막을 만드는 기술이 있었고, 그런 일을 찾다가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아굴라를 알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과 함께 머물며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며 유대인과 헬라 사람들을 권면했습니다. 얼마 후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내려옴으로 바울은 오직 말씀을 전하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행 18:5). 실라가 빌립보 교회에서 보내준 헌금을 가져왔기 때문에 더 이상 생계유지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던 것입니다(고후 11:9 ; 빌 4:15).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구약에서 말하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예수님이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언제나 반대 세력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에 바울은 그들에게 더 이상 말씀을 전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그 표시로 자기의 옷을 털었습니다(행 18:6a). 이러한 행위는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이 끝내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될 것이며 그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행 18:6b). 예수님께서도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마 10:14). 아울러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은 세상 마지막 날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 10:15). 복음은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해져야 했습니다(행 13:46 ; 롬 1:16).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행 3:25, 26 ; 롬 11:26). 예수님께서도 먼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마 10:6 ; 행 1:8). 바울은 그동안 가는 곳마다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마다 유대인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고, 고린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이제부터 이방인들에게로 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그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행 13:46). 이는 유대인들에게 아예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선교에 전념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거기를 떠나서 회당 바로 옆에 있는 디도 유스도라고 하는 사람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으로 회당에서 바울의 설교를 듣고 개종한 것으로 보입니다(행 18:7). 그는 바울이 유대인들의 반대로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자 자기 집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행 18:7). 유스도 외에도 회당의 관리 책임자인 그리스보를 비롯해 많은 고린도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행 18:8). 그들은 대부분 실라와 디모데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그리스보는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고전 1:14). 아마도 그가 유대교에서 차지하는 비중 때문에 바울이 직접 세례를 베푼 것 같습니다. 이는 고린도의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회당장 같은 유대교의 지도자급 인사가 기독교로 개종했으니 말입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크게 분노했을 것이고 다른 도시에서처럼 소요를 일으켜 바울에게 해를 가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바울은 크게 두려움을 느꼈는데,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바울은 고린도에 남아 계속 활동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유대인의 소요가 있기 전에 고린도를 떠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마치 구약의 엘리야 선지자를 보는 듯합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려 하자 브엘세바로 도망을 갔습니다. 브엘세바는 남유다의 최남단에 있는 성읍입니다(삼상 3:20 ; 삼하 24:2). 북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남유다 그것도 최남단까지 도망쳤다는 것은 그만큼 이세벨을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광야로 하룻길을 더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한 로뎀나무 밑에 앉아 하나님께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왕상 19:4). 로뎀나무는 광야나 사막에서 자라는 유일한 관목으로 잎이 무성하진 않으나 잔가지가 많아서 햇볕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해 줍니다. 며칠 전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보여주었던 당당한 모습과는 달리 광야 한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간구하는 엘리야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는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이제 누가 진짜 하나님인지 알게 되었고, 아합과 이세벨도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신앙의 결단을 내리지 못했고, 이세벨의 위협은 더욱 거세졌습니다(왕상 19:2). 이로 말미암아 엘리야는 깊은 절망과 좌절에 빠졌고 더 이상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목숨을 거둬 가시기를 구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로뎀나무에서 잠시 쉰 뒤에 호렙산으로 갔습니다. 브엘세바에서 호렙산까지는 2주도 채 안 걸리는 거리인데(신 1:2), 엘리야는 무려 40일 동안 그것도 밤낮을 걸어서 갔습니다(왕상 19:8). 왜 그리 오래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엘리야는 호렙산에 도착했고, 그곳에 있는 굴에 들어가 머물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엘리야가 왜 그곳에 있는지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아직도 할 일이 남아있음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이제 자기밖에 남지 않았는데 자신마저도 죽이려 한다고 하소연했습니다(왕상 19:10, 14). 그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선지자가 자기밖에 남지 않았고 자신의 힘으로는 이제 어찌할 수 없다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내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아직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그 우상에게 입을 맞추지 않은 사람 칠 천명을 남겨 두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왕상 19:18). 이에 엘리야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과 아직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다시금 용기를 내었습니다.

엘리야처럼 바울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주님께서 그를 찾아와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18:9) 바울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렇다고 유대인의 핍박이 사라지거나 위협이 없어진 건 아닙니다. 상황은 그대로이지만 그 상황에 맞설 수 있는 담대함이 바울에게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일 년 육 개월 동안 고린도에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바울처럼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기도 하고 그로 인해 두려워 떨 때도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좌절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니 두려워하지 말라”(마 20:28)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과 늘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맞이할 때 그로 인해 낙심하지 말고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