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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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1절 ~ 11절 [개역개정]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설교문 보기
죄인이 의롭게 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로마서 3:22, 24). 이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입니다(행 4:12).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이방인들은 양심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지금도 그들의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죄인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것이 가능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 곧 유일한 아들이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예수님 외에 그 누구에게도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시 27)’라고 하시거나,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삼하 7:14)’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고 했습니다(히 1:5).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일입니다(요 1:12).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믿음을 통해 죄인이 하나님과 양자 관계를 맺음으로써 신분이 변화되는 걸 의미합니다(롬 8:15).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친아들로서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본체’라고 했습니다(빌 2:5).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신 분, 곧 참 하나님이심을 의미합니다(요 1:1).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속량’이라는 표현을 통해 설명했습니다(롬 3:24). ‘속량’이란 자유를 얻기 위해 치르는 대가, 곧 몸값이나 그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조선시대에 몸값을 치르고[贖], 노비의 신분을 풀어 주어서 양민[良]이 되게 하던 일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노에나 전쟁포로, 죄수 등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지불하는 금전적 대가를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속량은 ‘구속’과 같은 의미를 지닌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노예가 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주신 사건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죄의 노예가 된 인류를 속량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히 9:15).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지으려는 부패한 성품, 죄성(罪性)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은 스스로 의를 행할 수 없게 되었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롬 3:23). 따라서 율법이든 양심이든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롬 3:20). 결국, 사람은 죄로 인해 죽음과 영원한 형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의 대가는 죽음이며(롬 6:23), 그 최종적인 결과는 영원한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운명에 처한 인류에게 살 수 있는 길, 곧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을 통한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게 하셨고(롬 3:25), 그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롬 3:26). 이처럼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롬 5:1). ‘화평(εἰρήνη)’이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오는 평안을 뜻합니다. 이는 10절에 나오는 화목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화목(καταλλάσσω)’은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둘 사이가 다시 친밀한 관계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친밀했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를 ‘하나님과 원수가 된 상태’로 묘사합니다(롬 5:10).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적대적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관계가 다시 회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둘 사이를 적대적인 관계로 만든 근본 원인, 곧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죄 없는 의로운 이의 피가 필요했습니다. 그 이유는, 죄의 대가가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롬 6:23). 죄 사함의 원리는 ‘죽음은 죽음으로’ 즉 ‘생명은 생명으로’ 배상하는 것입니다(출 21:23). 따라서 죄 사함을 위해서는 반드시 피 흘림이라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히 9:22). 피는 곧 생명이므로(창 9:4), 피 흘림 없이는 죄 사함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히 9:22). 하지만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죽음으로 자기 죗값을 치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감당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셔야 만 했던 이유는 피 흘림 때문입니다. 죄 사함을 위해서는 반드시 피 흘림이 있어야 하는데, 영은 육체가 아니므로 피를 흘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만일 이를 부인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곧 적그리스도입니다(요이 1:7).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죄로 인해 원수가 되었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롬 5:10).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고(롬 5:1),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으로 은혜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은혜 안에 거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미래를 소망하며, 그 소망 안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롬 5:2).
그뿐 아니라,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이는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롬 5:3, 4). ‘환난’은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로, 예수님께서도 여러 차례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환난은 단순한 고통이나 시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따르는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환난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요 16:33),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이기적인 욕망과 자기중심의 사고를 버리라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예수님과 신앙을 위해 기꺼이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헬라어에는 인내를 뜻하는 두 단어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에 사용된 휘포모네(ὑπομονή)입니다. 이 단어는 ‘~아래 머물다’라는 뜻으로,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인격과 믿음은 더욱 성숙해지고, 결국에는 소망을 이루어 냅니다(롬 5:4). 이 사실을 알고 있기에 우리는 환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롬 5:5).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그분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졌기 때문에 이 소망은 결코 우리를 낙심시키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언제입니까? 6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라고 했고, 8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고 10절에서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라고 했습니다. 이 표현들은 모두 같은 의미로,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의 절망적인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준다는 것은 현실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일입니다. 7절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이는 의롭고 선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이 드물기는 하지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의인이나 선인이 아닌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것도 가장 흉악한 죄인에게 내려지던 형벌인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롬 5:8).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사랑,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십자가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폄하하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방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십자가형은 흉악한 범죄자나 반역자에게 내려지던 가장 잔혹하고 수치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그런 형벌을 받은 예수가 어떻게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라고 할 수 있는지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복음을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해 버렸습니다(고전 1:23).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은 죄인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며,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엡 2:8).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죄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죄로 인해 원수가 되었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회복되었습니다(롬 5:10). 그렇다고 저절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과 더불어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평안을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평안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외적인 상황이나 형편에 영향을 받지 않는 영적인 안식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참된 평안입니다(요 14:27). 그러므로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평안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늘 함께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