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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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편 1절 ~ 7절 [개역개정]
1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2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3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4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5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6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7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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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생애는 유대 민족의 역사와 닮은 부분이 많습니다. 유대인은 오랜 역사를 지닌 민족이지만 끊임없이 다른 민족에 의해 정복당하거나, 포로가 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A.D. 70년, 로마에 의해 멸망한 후 1948년 독립하기까지 19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나라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무려 600만 명이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는데, 이는 당시 유럽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의 약 3분의 2, 전 세계 유대인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습니다. 이러한 고난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있었던 한 일화입니다. 어느 유대인 랍비가 아들과 함께 집단 수용소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1944년 추운 겨울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수용소 건물의 한쪽 구석으로 가서 조용히 말했습니다. “사람은 밥을 먹지 않아도 3주는 살 수 있고, 물을 마시지 않아도 3일은 버틸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우리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 희망은 온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유대인들은 오히려 기독교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A.D. 313년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고, 380년에 국교로 제정하면서 그 관계는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중세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강제 개종이 이루어졌고, 이를 거부하면 추방되거나 거주지가 제한되었습니다. 이때 형성된 것이 ‘게토(Ghetto)’라 불리는 유대인 거주 지역입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과 분리된 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했으며, 특정 복장을 착용하도록 강요받는 등 인종적 차별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반유대주의 정서는 근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심화되었고, 결국 유대인의 대량 학살로 이어졌습니다. 1948년, 비로소 유대인들은 나라를 되찾았지만, 수난의 역사는 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한 직후,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해 약 1년 동안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후에도 세 차례에 걸쳐 아랍 국가들과 전쟁을 치렀으며, 이스라엘이 모두 승리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중동 국가들과 무력 충돌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대 민족의 역사는 다윗의 생애와 많이 닮아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 오랜 세월 사울에게 쫓기며 고난을 겪었고, 왕이 된 후에도 아들의 반역으로 인해 수난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이런 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참된 희망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친구들은 그에게 ‘새처럼 산으로 도망하라’고 권했습니다. 새들은 위험을 느끼면 본능적으로 숲이 우거진 산으로 날아가 몸을 숨깁니다. 그처럼 다윗에게도 산으로 피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권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과 그 주변 지역은 석회암 지대가 널리 분포해 있어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동굴은 범죄자나 도망자들의 은신처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마 21:13). 다윗도 사울에게 쫓길 때 그런 동굴에 숨은 적이 있습니다(삼상 24:3). 하지만 다윗의 측근들이 ‘새처럼 산으로 도망하라’고 한 것은 단순히 산으로 몸을 피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 피하는 것보다,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오히려 더 안전하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신앙보다 현실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과 타협하면, 삶이 편해질 수 있습니다. 세상과 부딪칠 일도 없고(요 15:19), 신앙으로 인한 박해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딤후 3:12).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고, 교회 역시 점점 세속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선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 있을 때부터 이미 세상의 풍습에 물들었고,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세상을 가까이했습니다. 그러한 죄악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깊어졌고, 아합이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는 극에 달했습니다. 아합은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결혼한 후, 바알과 아세라를 본격적으로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사사시대에도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한 적이 있었으나(삿 2:13) 아합 때는 국가 차원에서 그 우상들을 숭배했습니다. 사사시대의 우상숭배가 자발적이었다면, 아합 시대에는 강압적으로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주도한 인물은 아합이 아니라 그의 아내 이세벨입니다. 그녀는 냉혹하고 잔인한 여인으로, 북이스라엘을 우상의 나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처럼 그 일에 방해가 되는 자들을 모두 제거하려 했습니다(왕상 18:4). 그런 상황에서 공개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곧 박해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엘리야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신앙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라”(왕상 18:21). 이는 단순히 ‘누가 참된 신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시라면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마땅히 그분을 섬겨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마 16:24). 진리를 따르는 길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 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라면 어떤 희생도 마땅히 감수해야 합니다(마 7:14).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세상과 타협하며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하신 말씀 중에도 이를 지적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이라는 여인을 용납함으로써, 교인들이 우상숭배와 음행에 빠지도록 방치한 것에 대한 책망을 받았습니다(계 2:20). 여기서 이세벨은 실명이 아니라 구약에 등장하는 이세벨을 빗댄 상징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두아디라 교회에 구약의 이세벨처럼 잘못된 가르침으로 교인들을 우상숭배에 빠지게 하고, 세속화로 이끈 거짓 선지자가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의 위협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습니다. 다윗은 이를 악인이 활을 당겨 마음이 정직한 자를 노리는 모습에 비유했습니다.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시 11:2) ‘마음이 바른 자’란 7절의 ‘정직한 자’와 같은 의미로 하나님 앞에서 신앙을 지키며 바르게 살고자 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화살을 시위에 먹인다’라는 표현은 활을 언제든 쏠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신앙을 위협하는 세력들이 언제든 공격해 올 수 있는 긴박하고 위협적인 상황을 묘사합니다. 더욱이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는 공격이기에, 그 위협이 어디서, 어떻게 닥쳐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악인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그리고 집요하게 의인들 곧 신앙의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윗이 대적들로부터 언제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상황에서 친구들은 다시 다윗에 말합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여기서 ‘터’란 사회의 근간인 법과 질서를 의미합니다. 당시에는 이 법과 질서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본 시편의 시대적 배경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피 생활을 시작하던 무렵으로 추정됩니다. 그 시기에 신앙은 말할 것도 없고, 도덕과 정의마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잡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제사장 85명을 비롯해 놉에 살고 있는 남녀노소, 심지어 가축까지 모조리 진멸할 정도였습니다(삼상 22:18, 19). 친구들은 이러한 무법한 현실 앞에서 의인이라 한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며, 다윗에게 더 이상 신앙을 고집하지 말고 현실에 순응하라고 조언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욥의 아내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녀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키려 했던 남편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차라리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조롱하듯 말했습니다(욥 2:9). 그럼에도 욥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욥 2:10).
다윗 역시 친구들의 말에 흔들리기는커녕 오히려 단호하게 말합니다. “내가 이미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았는데, 너희는 왜 나더러 산으로 도망치라고 하느냐.”(시 11:1) 이는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결단이자 믿음의 고백입니다. 친구들은 세상과 타협하면 더 안전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을 텐데, 다윗은 왜 굳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다윗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시 11:4) 아무리 세상이 혼란스러워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십니다. 비록 현실에서는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이 고통받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섭리와 뜻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악인이 번성하고 의인이 고난 받는 현실을 보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거나 ‘신은 죽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죄에 대해 즉각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죄에 대해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하늘의 보좌에서 인생을 주의 깊게 살피시며, 마음의 생각과 뜻까지 지켜보고 감찰하고 계십니다. 또한 사람들의 모든 행위를 빠짐없이 기록해 두셨다가, 마지막 날에는 그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계 20:12). 그래서 악인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고(시 11:6 ; 계 21:8), 의인 곧 마음이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시 11:7). 예수님께서도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8). 시대는 다르지만, 하나님을 뵐 수 있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 가운데 주어집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윗처럼 어려움을 만날 때에 ‘새처럼 산으로 도망하라’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신앙보다 현실의 문제를 먼저 생각하라는 것으로, 지극히 인간적이며 불신앙적인 태도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만날 때에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피해야 합니다.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분의 보좌에 앉으셔서 세상을 살피시며, 의인을 돌보시고 악인과 폭력을 일삼는 자를 미워하십니다(시 11:5).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고후 5:7).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이 땅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게 될 것이며, 그때 하나님의 공의도 완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그날을 소망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항상 정직하게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