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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yeum 2025. 7. 7.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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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장 1절 ~ 6절[개역개정]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3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4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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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에게는 삶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육신의 욕심을 따라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살았지만,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성령을 따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이 어떤 삶인지를 크게 세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1.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사랑은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고전 13:13). 그 이유는 기독교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되었고, 그 사랑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3:8). 인간은 허물과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골 1:21). 바울은 이 상태를 ‘우리가 원수가 되었다’라고 표현합니다(골 1:21; 롬 5:10).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적대적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관계가 회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둘 사이를 갈라놓은 근본 원인, 곧 죄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만 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셨습니다(빌 2:8). 이로써 죄의 문제는 완전히 청산되었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롬 5:10).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분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롬 5:1). 이 모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 된 자들과 화해를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를 기꺼이 죽음의 자리로 내어주셨고(갈 1:4), 그를 통해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크고 분명한지를 보여 주셨습니다(요일 4:10).

이처럼 기독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이기도 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물론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는 말씀처럼 구약에서도 사랑은 중요한 계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은 사랑의 기준과 범위가 이전과는 본질적으로 달라진, 말 그대로 새로운 차원의 계명이었습니다. 구약의 계명은 사랑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었지만, 새 계명에서는 그 기준이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결코 변함이 없으시며(요 13:1), 그 사랑의 범위 또한 이웃을 넘어 원수에게까지 넓어졌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같은 민족 사람만을 이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이나 사마리아 사람은 애초에 이웃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사마리아 사람이나 이방인도 이웃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눅 10:36). 또한 유대인들은 같은 민족 중에서도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만을 이웃으로 간주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곧 ‘자신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런 사랑은 세리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마 5:46). 세리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멸시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로마 정부를 대신해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찍혔고, 징수 과정에서 정해진 세금보다 더 걷거나(눅 3:12) 속여 빼앗는 일도 서슴지 않았기에(눅 19:8) 약탈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 세리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사랑으로 보답할 줄 압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한다면 그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고 하심으로써 사랑의 범위를, 이웃을 넘어 자신을 미워하는 원수에게까지 확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새 계명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랑을 바탕으로 독자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먼저 1절에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형제란 혈연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엡 2:13) 영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13:22, 23). 히브리서가 쓰일 당시에는 그리스도인들 특히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 이중삼중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동족인 유대인들과 로마제국으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앙을 저버리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형제에 대한 사랑이 점점 식어져 가자, 히브리서 기자는 비록 신앙적으로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더라도 형제 사랑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어지는 2절의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는 권면은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이자 형제 사랑을 계속하기 위한 한 방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손님’은 ‘나그네’를 의미하는데, 단순한 여행자라기보다는 문맥상 그리스도인 형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시에는 로마 정부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였습니다(히 10:32, 33). 이러한 박해를 피해 이리저리 유리하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히 11:37, 38),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이른바 순회 전도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반 나그네와는 달리 숙식을 해결하기가 어려웠고, 그들을 도와주었다가 자칫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대접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형제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딤전 3:2; 딛 1:8). 그렇게 함으로써 아브라함처럼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게 될 수도 있음을 히브리서 기자는 언급했습니다(히 13:2 하). 이는 나그네를 대접함으로 얻게 될 유익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손님을 대접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위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면 마땅히 실천해야 할 일임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3절 역시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는 앞 절에서와 마찬가지로 형제 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개인적인 잘못 때문이 아니라 신앙 때문에 갇히거나 핍박받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음식이나 의복조차 마련할 수 없어, 감옥에서 굶거나 병들어 죽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형제를 돕는 일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재산을 빼앗기거나(히 10:34) 모욕을 당하는 등(딤후 1:16, 17) 여러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지체이기에(고전 12:12), 고난 받는 형제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히 13:3).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행위가 곧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5:35, 38, 40).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함께 어려움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고통은 줄어들고, 사랑은 더 깊어질 것입니다(갈 6:2).

2. 정결을 지키는 삶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4절에서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 이유는 음행 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결한 삶은 결혼을 귀히 여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제도로 사람에게 부여하신 가장 기본적인 질서입니다(창 2:24). 이를 깨트리면 개인은 물론 가정, 나아가 신앙공동체인 교회에까지 심각한 해를 끼치게 됩니다. 아울러 그것은 곧 결혼을 제정하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이므로 결코 용납될 수 없으며, 반드시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3. 자족하는 삶입니다.

‘자족하는 삶’이란, 현재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돈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수단입니다. 그러나 돈이 필요하다는 것과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딤전 6:10 상). 돈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지만 돈에 욕심을 가지게 되면 잘못된 길로 가기 쉽고(약 1:15), 나아가 돈의 노예가 되어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다가 결국은 멸망과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딤전 6:10 하).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 곧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 6:24). 사랑하는 쪽은 중히 여길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쪽은 업신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물은 소비의 대상이지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돈이면 다 해결될 것 같은데, 이 세상에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죽음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있다 해도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며(히 9:27)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인생의 결말입니다.

어느 마을에 학식과 덕망을 겸비하고 큰 권세를 누리던 사람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에 한 스승이 제자들을 데리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자 중 하나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기고 나를 따르라 하시더니, 오늘은 무슨 까닭에 그런 자리에 가시는 겁니까?” 그러나 스승은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 후 상가에서 돌아온 스승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보았는지를 물었습니다. 어느 제자는 그렇게 많은 문상객이 몰린 건 처음 본다며, 학식과 덕망이 지닌 위대한 힘을 실감했다고 했습니다. 다른 제자는 권력의 힘이 어떤지를 새삼 느꼈다고 했고, 장례식이 그토록 장중하고 경건한 것인지 깨달았다는 제자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말을 들은 스승의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그런데 한 제자의 말에, 스승은 환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 제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죽음을 보았습니다. 저의 죽음과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의 죽음을 말입니다.” 죽음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죽음 앞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물이나 명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자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5절 하반부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지켜주시고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구약의 말씀들(신 31:6 ; 수 1:15 등)을 인용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현재 주어진 여건에 만족해야 하는 것은, 세상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켜주시고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시 118:6, 7)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계시며 때를 따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고, 손님을 기쁘게 대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롬 6:4). 이는 성령을 따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 곧 사랑을 실천하고, 정결을 지키며, 자족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고 또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요 1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