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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yeum 2025. 7. 10.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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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 31절 ~ 39절 [개역개정]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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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권리뿐만 아니라, 고난에도 동참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롬 8:17).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될 이 영광은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도 고대하고 있는 바입니다(롬 8:19).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가 인간뿐 아니라 자연계에도 임했으며(창 3:18 ; 롬 8:20), 그로 인해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함께 탄식하며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8:22). 그러나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분처럼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빌 3:21). 바울은 이를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이라고 표현했습니다(롬 8:23).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곧 양자가 되었습니다(롬 8:15). 그럼에도 ‘양자가 될 것’이라고 미래형으로 말한 것은, 우리의 몸이 아직 사망의 권세 아래 있고,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몸의 속량’이라는 표현은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이나 우는 것이나 아픔이 더 이상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계 21:4). 그때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롬 8:21). 그러기 때문에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그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러한 소망 가운데서 얻어진 것입니다(롬 8:24 상). 그래서 지금 우리는 비록 눈에 보이진 않지만, 장차 반드시 이루어질 영광을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소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롬 8:24 하). 소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기대이지, 이미 이루어져서 눈에 보이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롬 8:25). 하지만 그 과정이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소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지만, 때로는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조차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26절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다. 이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롬 8:27).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 안에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요일 5:14).

그런데 성령께서는 기도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문제를 이겨낼 수 있도록 항상 곁에서 돕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가리켜 ‘보혜사’(요 14:16)라고 부르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보혜사(保惠師)’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곁에서 돕기 위해 부름을 받은 자’란 의미로, 당시 법정에서 피고인의 변호를 맡은 사람, 곧 변호인을 지칭하는 용어였습니다.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돕고 계시는 대상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했는데(롬 8:28),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만이 진정한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은혜가 주어집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라는 말씀은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다시 말해 좋은 일뿐만 아니라 고난이나 실패, 질병, 억울한 일등 모든 상황이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유익하고 선한 결과로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요셉입니다. 그는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렸고, 애굽에서 종살이뿐 아니라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는 고난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결국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기 가족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창 50:20). 이처럼 요셉의 삶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라는 말씀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설사 이 땅에서 그런 결과를 보지 못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세상보다 더 나은 본향이 있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그 본향을 사모하며 이 땅에서 겪는 고난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히 11:16).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어서 바울은,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구원을 어떻게 이루어가는지를 단계적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여기서 논란이 되는 부분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웨슬리는 이들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들로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그 부르심에 응답할지를 미리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예지(豫知)’라고 하는데,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미리 정하신 것, 즉 ‘예정(豫定)’도 이 예지에 근거한다고 보았습니다. 반면에, 칼빈은 ‘미리 아신 자들’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예지는 예정에 근거합니다. 미리 정하셨기 때문에, 미리 아신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이러한 견해는 사도행전 13장을 설교할 때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많은 유대인이 이를 거부하며 반대했습니다. 이에 두 사람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한다”라고 말했습니다(행 13:46). 이 말은 들은 이방인들은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했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행 13:48).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되었다’라는 말은 ‘영생을 얻도록 정하셨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작성하셨다는 의미입니다(요 3:16).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사망 곧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내리시기로 정하셨습니다(살후 1:9).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유대인들을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로 규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자들은 ‘영생을 얻기에 합당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생 곧 구원은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고, 믿지 않으면 정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정하신 게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자처한 것입니다(행 13:46). 복음을 들어도 그것이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듣는 자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히 4:2). 그러므로 그 책임은 전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딤전 2:4). 또 한 사람이라도 멸망치 않고 모두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오래 참으신다고도 하셨습니다(벧후 3:9). 그런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구원받도록 미리 정하시고, 누구는 멸망하도록 예정하셨을 리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전지 하신 분이시기에 누가 구원받을 자인지 누가 멸망할 자인지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정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와 멸망받을 자를 예정하셨고 한다면 그것은 웨슬레가 이해한 것처럼 ‘미리 아심’ 곧 예지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롬 8:29).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미리 정하셨으며,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며, 의롭다 하신 자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롬 8:30). 여기서 ‘영화롭게 하셨다’라는 표현은 과거 시제로 되어있으나, 실제는 미래에 이루어질 구원의 완성을 가리킵니다. ‘영화’란 성도의 몸과 영혼이 완전히 새롭게 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상태를 가립니다. 그러므로 영화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비로소 이루어질 것입니다(빌 3:21; 고전 15:42–44). 이 일에 대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롬 8:31).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하나님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롬 8:32). 우리를 의롭다 하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우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롬 8:33, 34).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롬 4:25). 그리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셨음을 의미합니다(벧전 3:22). 그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롬 8:34). 성령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롬 8:35). 환난이나 곤고, 박해나 기근(굶주림), 적신(헐벗음)이나 위험 그리고 칼,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는 없습니다. 이는 시편에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시 44:22). 비록 우리가 이 땅에서 온갖 어려움을 당하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롬 8:37). 왜냐하면 죽음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롬 8:38, 39). 이 사실을 확신할 때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능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상황, 그것이 좋은 일이든 힘들고 어려운 일이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들이 있을지라도, 그것들마저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유익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시 119:71).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더욱 성숙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며, 마침내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엡 4:13).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확신한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믿음을 가지고 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