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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yeum 2025. 7. 14.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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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5편 1절 ~ 5절 [개역개정]

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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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보통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마음가짐이나 태도가 달라지곤 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이나 신뢰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마음이 즐겁고 편안하지만, 싫어하거나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불편해서 되도록 피하고 싶어 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신가요?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으신가요?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시편 15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인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과 늘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본 시편은 다윗이 지은 시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시 15:1) 여기서 ‘주의 장막’과 ‘주의 성산’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그곳에 머물거나 산다는 것은 단순히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반에 걸쳐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말한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바로 이것입니다(롬 12:1). 사실 이러한 삶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다윗은 그러한 삶을 보여주는 몇 가지 실제적인 행동들을 제시했습니다.

1. 정직하게 행하고 공의를 실천하며 진실을 말하는 자(2)

‘정직하게 행하고 공의를 실천한다’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사실상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로마서 7장에서 보듯이, 인간은 선과 악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살아갑니다(롬 7:19).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보다는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정작 다윗 자신도 그런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비록 성경이 다윗에 대하여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행했다’라고 평가하고 있지만(왕상 3:6),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진실을 말하지 못한 일입니다. ‘진실을 말한다’라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거나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고,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위기의 순간에 거짓을 말하거나 사실을 숨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에게 쫓기던 시절,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거짓으로 미친 척하여 위기를 모면했습니다(삼상 21:13). 비록 목숨은 건졌으나 하나님의 백성, 그것도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으로서 매우 부끄럽고 참담한 일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충직한 부하 우리야를 죽음으로 내몰기도 했습니다. 그런 다윗이 정직과 공의 그리고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 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추구해야 할 삶이며, 그 삶의 방향을 우리에게 제시하기 위함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누구도 그분 앞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도 다윗처럼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정직하게 행하고, 공의를 실천하며, 진실을 말하는 자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2.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이웃을 비방하지 않는 자(3)

‘남을 허물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헐뜯기 위해 그 사람의 허물을 들추어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행위는 그 사람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악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결국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 공동체에 해를 끼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지,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웃을 비방하는 것 또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입니다. ‘비방한다’라는 말은 다른 사람을 모욕하거나 수치감을 주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말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보다, 위로하고 격려하며 세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3.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않는 자(4)

‘망령된 자’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그런 자들을 경멸해야 합니다. 이는 그들을 모욕하거나 비방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행위를 단호히 거부하라는 의미입니다. 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칙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삼상 2:30). 이는 엘리 제사장에게 하신 말씀으로,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의 직분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제사의 규례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행위로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한 것입니다(삼상 2:17). 엘리는 대제사장으로서 아들들의 행위에 대해 단호히 대처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단지 말로만 그들을 책망했을 뿐(삼상 2:24) 어떤 징계나 제재도 가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삼상 2:29).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엘리 가문의 제사장직을 거두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삼상 2:30). 이처럼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는 하나님께서도 그를 경멸하시지만,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께서도 그를 귀히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을 멸시하는 망령된 자를 멀리하고,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또한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여기서 ‘서원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샤바’는 본래 ‘맹세하다’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실제로 다른 구절에서는 이 단어가 ‘맹세하다’로 번역되었는데, 이 구절에서만 ‘서원하다’로 번역했습니다. ‘서원’과 ‘맹세’는 모두 약속을 가리키지만, 그 대상에 차이가 있습니다. 서원은 하나님께 드리는 약속을 의미하고, 맹세는 일반적으로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약속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의 서원은 그 대상이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맹세를 하나님과 관련지어 언급하셨습니다(마 5:33). 이는 맹세라는 행위가 결국 하나님 앞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맹세의 대상이 누구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행해지는 일이므로, 결코 가볍게 여겨져서는 안 됩니다. 비록 손해가 되더라도 혹은 상황이 바뀌더라도, 자신이 한 말에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4.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5)

고대 사회에서 돈을 빌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했으며, 주로 같은 민족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돈을 빌려 줄 경우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하셨고(출 22:25), 이자를 위하여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셨습니다(레 25:37). 이는 단순히 금전 거래에 관한 규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공동체를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 달리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출 34:27) 공동체 의식이 강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가난한 자들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는 자들이 있다면 이는 언약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크게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귀족들과 관리들이 동족의 어려운 처지를 이용해 폭리를 취했고, 빚을 갚지 못한 경우 그들의 자녀를 종으로 삼기까지 했습니다(느 5:7, 8). 이와 같은 사례들이 성경에 모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자주 발생했을 것입니다. 다만, 외국인에게는 이자를 금지하는 규정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신 23:20). 이는 금전 거래가 일종의 상업적인 활동으로 그 자체가 죄악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정당한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이루어지는 금전 거래는 율법의 정신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원수에게조차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고 하셨습니다(눅 6:35). 이는 원수에게 무엇인가를 빌려주더라도, 그로 인해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기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 인자하시고,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마 5:45). 그와 같이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이 실천해야 참된 삶의 모습입니다. 또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않는 것 역시 성도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삶입니다. 뇌물은 단지 금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대가로 받는 모든 혜택이나 이익을 포함하며, 이는 정의와 공의를 굽게 하는 대표적인 죄악입니다. 뇌물에 관한 문제는 주로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서 발생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사무엘의 아들들입니다. 그들은 재판관으로서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했습니다(삼상 8:3). 이러한 일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 온 문제이며, 하나님에 대한 두려워함이 없는 곳에서 더욱 심각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장막에 머무를 수 없고, 주의 성산에 거할 자격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살펴봤습니다. 그들은 정직하게 행하고 공의를 실천하며 진실을 말하는 자,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이웃을 비방하지 않는 자,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않는 자,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흔들림이 없습니다(마 7:24). 하나님께서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늘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