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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yeum 2025. 7. 24.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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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장 1절 ~ 10절 [개역개정]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설교문 보기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에 대한 반론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것은, 그의 의로움이 아니라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롬 9:16).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다 보니, 선택받지 못한 것뿐 아니라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문제의 책임도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결국 이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토기장이를 예로 들면서,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라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롬 9:20). 왜냐하면 토기장이가 같은 진흙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다른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자기 뜻대로 사람을 선택하실 권한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롬 9:21). 따라서, 피조물인 우리는 그 결정에 대해 감히 따질 수 없고, 따져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선택이 하나님의 예지, 곧 미리 아심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롬 8:29).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누가 구원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할지를 미리 아시고, 그에 따라 영광을 받게 될 긍휼의 그릇과 멸망에 이르게 될 진노의 그릇으로 구별하신 것입니다(롬 9:22, 23). 사실 ‘예지’나 ‘예정’은 인간의 시간 개념에 기반한 것이지, 하나님께는 과거나 미래라는 구분이 없고 단지 ‘영원한 현재’만이 있을 뿐입니다(C.S. Lewis).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구원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모두 멸망에 이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 중에도 영광을 받게 될 긍휼의 그릇이 있었습니다(롬 9:24). 이에 대해 바울은 호세아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설명합니다.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호 2:23),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호 1:10)”(롬 9:25, 26) 이 말씀은 원래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으며, 그 결과 멸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가운데 씨를 남겨 두셨는데, 그들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남은 자’입니다(사 10:22). 만일 이러한 은혜가 아니었다면 이스라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소돔과 고모라처럼 완전히 멸망했을 것입니다(사 1:9; 롬 9:29). 비록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처럼 많다고 해도 오직 ‘남은 자’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롬 9:27).

그런데, 바울은 이 ‘남은 자’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국한하지 않고, 이방인에게까지 그 범위를 확대합니다. 이방인 중에도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롬 9:24).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응답한 자들로서, 구원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혈통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응답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화를 통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매년 여름이 되면 물놀이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어떤 사람이 깊은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그에게 구명 튜브를 던져 주었습니다. 그는 그 튜브를 붙잡기만 하면 살 수 있습니다. 이 구명 튜브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튜브를 붙잡는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바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라는 에베소서 2장 8절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만약 그 튜브를 붙잡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물에 빠져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벧 3:9). 그래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고 계시지만,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만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고, 구원 곧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히 4:2).

바울은 이것을 ‘믿음에서 난 의’(롬 9:20) 또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부릅니다(롬 9:30; 10:6). 그런데, 유대인들은 믿음이 아닌 행위 곧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구원에 이르지 못했고, 도리어 부딪치는 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롬 9:32). 여기서 ‘부딪치는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예언한 바 있습니다.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사 8:14; 28:16)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가 되시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로운 산 돌이요(벧전 2:4) 구원의 반석이 되십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율법을 지켰지만, 그것은 올바른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롬 10:2). 왜냐하면 율법은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는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모세가 기록한 바와 같이(레 18:5),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에 따라 살게 될 것입니다(롬 10:5). 그러나 현실적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은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없으며, 다만 그것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될 뿐입니다(롬 3:20). 그럼에도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기 의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롬 10:3).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 했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하나님의 의와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리킵니다(롬 10:6).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의가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이 이 의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롬 10:6). 이는 율법의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율법이 그 역할과 기능을 다했음을 뜻합니다(마 5:17; 갈 3:24). 율법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그림자입니다. 모형이나 그림자는 참 형상인 실체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므로, 실체가 나타나면 사라지는 게 당연합니다(갈 3:19). 또한 예수님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온전히 이루셨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율법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의로운 행위’입니다. 이를 어기면 율법은 그를 정죄하고, 그 대가로 죽음을 요구합니다(롬 6:23). 하지만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율법의 모든 요구는 충족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원한 생명 곧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이 구원의 진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려고 하늘에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또 밑 없는 구덩이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얻기 위해 내려갈 필요도 없습니다. 이 진리는 우리의 입과 마음처럼 아주 가까이에 있어서 누구든지 쉽게 듣고 접할 수 있습니다(신 30:14; 롬 10:8). 이것이 바로 바울이 전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롬 10:8). 이 말씀의 핵심을 요약한 것이 바로 9절과 10절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 10). 예수님께서 나의 주님이 되신다는 것, 예수님만이 나를 죄에서 구원하실 유일한 구원자가 되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 곧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모든 것을 끝내셨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 한 번은 죽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히 9:27).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삶을 마감하셨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된 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고전 15:3, 4). 이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사람들 앞에서 시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마 10:32). 그것이 곧 참된 믿음이며, 그 믿음이야말로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게 하는 믿음입니다(히 10:3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이유로 ‘여호와’ 대신 ‘아도나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아도나이’는 히브리어로 ‘주’를 의미하며, 신약에서는 그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퀴리오스’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었습니다(마 22:44). 그런데 이방인들 역시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퀴리오스’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왕에게도 이 호칭을 붙였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자신이 세상의 주와 하나님이며 사람들에게 그렇게 부르도록 강요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님만을 ‘퀴리오스’로 시인했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이요 세상의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마 10:22). 그런 환경 속에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그 믿음이 참된 믿음임을 나타내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선조들을 본받아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입술의 고백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삶을 통해 드러나는 실제적인 고백이어야 합니다(딛 1:16). 그런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