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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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7편 1절 ~ 15절 [개역개정]
1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2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
3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4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5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
6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7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8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9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10 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
11 이제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그들이 에워싸서 노려보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12 그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13 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14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1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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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은 총 150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73편이 다윗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중 본 시편을 포함하여 세 편에 ‘다윗의 기도’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시 86; 142). 대부분 표제가 ‘시’로 되어 있는 것과 달리 ‘기도’라는 표제가 붙었다는 것은 그 내용이 어떤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한 마디로 이 시편들에는 다윗의 간절한 호소가 담겨있습니다. 본 시편이 어떤 상황에서 기록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학자들 대다수는 다윗이 사울을 피해 마온 광야에 있을 때로 추정합니다(삼상 23:24).
먼저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간절한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를 호소합니다.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시 17:1) 여기서 ‘의의 호소’란 ‘의로운 호소’ 또는 ‘의로운 자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왔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기도를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거짓되지 아니한 입술’ 역시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입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자신을 죄가 전혀 없는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롬 3:10).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입니다(롬 3:23). 그럼에도 다윗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 것은, 아무런 잘못 없이 고난 받고 있는 부당한 현실을 호소하기 위함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이유는 그에게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시기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자기보다 다윗을 더 칭송하자 그를 시기했고(삼상18:8, 9), 하나님께서 자신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심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삼하 19:2).
이처럼 다윗은 아무 잘못도 없이, 그것도 오랜 세월 동안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으니, 그 억울함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공의로 판단해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시 17:2). 자신의 결백함을 하나님께서 친히 밝혀주시고, 악한 자들에게 핍박받고 있는 자신을 살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을 시험하셨고, 감찰하셨으나 아무 허물도 발견하지 못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시 17:3 상)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이 겪는 고난이 그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님을 아시고, 그의 결백함을 인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찾지 못하셨다’라는 표현은 미완료형으로, 하나님께서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다윗에게서 허물을 찾지 못하실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죄를 짓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 하지 아니하리이다”(시 17:3 하)
입은 소리를 내는 기관으로, 성경에서는 입술이나 혀와 함께 말, 곧 언어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입으로 범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말로 죄를 짓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를 실천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기자는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라고 했습니다(약 3:2). 그와 같이 자신의 의지로 말을 항상 올바르게 사용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약 3:8). 그럼에도 다윗이 입으로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백함을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다윗도 자신의 힘으로는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입술의 문을 지켜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시 141:3). 우리도 다윗처럼 입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항상 말을 조심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입술을 통해 늘 찬송과 감사, 그리고 선한 말만이 흘러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다윗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스스로 조심하고, 주의 길을 굳게 지켜 실족하지 않았다고 고백했습니다(시 17:4, 5).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다윗의 고백처럼 우리의 발을 인도하는 등불이며, 우리의 길을 밝히는 빛입니다(시 119:105). 어두운 길을 갈 때 등불이 없으면 길을 못 찾아 헤매거나 엉뚱한 길로 갈 수도 있고, 또 넘어져 다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우리는 이 어둠의 세상에서 참된 인생의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등불이자 빛이 되어 우리를 항상 올바른 길로 인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딤후 3:16).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지표로 삼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다윗은 그런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시 17:6)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간구합니다.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시 17:7). 이는 주께 피하는 자들 곧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크고 놀라운 사랑을 나타내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의지하는 자들을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그들을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어 압제하는 악인들과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실 것입니다(시 17:8). 눈동자는 가장 소중한 것을 상징하며, 그것을 지키신다는 것은 철저하고 완전하게 보호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신다’라는 표현 역시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피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가 아니겠습니까? 성도가 하나님이 아니면 누구에게 피하겠습니까? 성도라면 마땅히 하나님께 피할 것이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성도들을 압제하며 그들의 생명을 노리는 자들이 있습니다(시 17:9). 그들이 누구인지 다윗은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먼저 그들은 마음이 기름에 잠겼고, 입으로는 교만하게 말하는 자들입니다(시 17:10). ‘마음이 기름에 잠겼다’라는 말은 마치 양심에 화인을 맞은 자처럼(딤전 4:2) 그들의 마음이 무감각해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화인’은 쇠붙이로 만든 도장으로, 이를 불에 달구어 가축이나 노예의 신체 부위에 찍어서 소유권을 표시했습니다. 화인이 찍힌 부위는 점차 딱딱해져서 감각을 잃게 됩니다. 이처럼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들은 마음의 감각이 무디어져서(엡 4:19), 성도를 압제하고 핍박하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악한 일인지 깨닫지 못한 채 그 일을 서슴없이 자행합니다. 그뿐 아니라 교만한 말로 업신여기고 멸시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그들은 주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을 에워싸고 노려보며 땅에 넘어뜨리려 합니다(시 17:11). 그 모습은 마치 움킨 것을 찢으려는 사자 같고,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와도 같습니다(시 17:12). 사자는 광야에서 가장 위험한 짐승이며, 특히 젊은 사자는 매우 포악한 것을 알려져 있습니다(렘 2:15).
다윗이 악인들을 사자에 비유한 것은, 그들이 포악하고 교활한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겉으로는 평온해 보일지라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자는 사냥 전에 조용히 엎드려 있지만, 그것은 공격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지 진정한 평온함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악인들도 겉으로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사람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성도를 해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때를 기다리며 은밀히 숨어 있다가, 기회가 오면 감추고 있던 본성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방심하는 순간을 노리고 있으며, 영적으로 느슨해지는 틈을 타서 달려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세력들이 틈을 타지 못하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살전 5:6; 벧전 5:8),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벧전 4:7).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악의 세력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우리가 흔들림 없이 주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어서 다윗은 그들을 가리켜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시 17:14 상). 이는 세상에서 풍요와 만족을 누리는 악인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며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아이들에게 물려줍니다(시 17:14 하).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운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사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것을 맡은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면서도 정작 하나님 자신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땅의 것 즉, 자신의 배와 자녀와 유산에 있으며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말합니다. 마치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들은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세속적인 것들보다 영적인 일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았습니다. 또한 그는 악인들의 번영을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참된 만족은 주의 얼굴을 뵙고 그분과 함께하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시 17:1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세가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며 그것의 많고 적음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내세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성도에게는 다윗처럼 하나님만이 삶의 전부이고,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비록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삶 그 자체로 만족합니다. 그러기에 악인의 궁정에서 천 날을 사는 것보다 하루를 살더라도 하나님의 성전에서 문지기로 있는 게 더 복된 일이라고 여깁니다(시 84:10). 우리도 그런 믿음과 고백으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