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성경본문 보기
히브리서 13장 7절 ~ 17절 [개역개정]
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설교문 보기
지난 시간에 이어, 이번 시간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대해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1. 교회의 지도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7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일러 주고 인도하던 자들’이란 과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믿음의 본을 보였던 교회의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성도들을 신앙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또한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으며,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행실의 결말’이며, 이를 ‘주의하여 보라’는 것은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깊이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순교를 각오하며 끝까지 붙들려고 했던 신앙의 대상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히 13:8). 그러므로 우리는 순교의 삶을 살았던 교회 지도자들을 비롯해 믿음의 선조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의 경주를 완주해야 할 것입니다.
2.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교훈’이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 교훈들을 말합니다. 그중 하나는 음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여전히 율법의 규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행 15:1; 21:20). 음식에 관한 규정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짐승은 크게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구분됩니다. 그중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정결한 것만 식용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네 발 가진 짐승 중에서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만 먹을 수 있었는데(레 11:3), 소나 양, 염소, 사슴, 노루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신 14:4, 5). 반면, 한국 사람들이 가장 즐겨 먹는다는 돼지고기는 부정한 것으로 분류되어 식용이 금지되었습니다. 물에 사는 생물 중에서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만 허용되었기 때문에(레 11:9), 장어나 전복, 새우 등은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짐승을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나누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성경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으나, 짐승 자체가 본질적으로 정결하거나 부정하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신약에서도 같은 이유로 식용을 금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구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다른 민족들과 구별된 존재임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의 상징적인 표지였을 것입니다(레 11:44, 45).
그런데, 이러한 구분은 신약에 와서 폐지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막 7:19). 이러한 사실은 베드로의 환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행 10:12-15). 베드로는 욥바에 있는 시몬의 집에서 기도하던 중, 하늘이 열리며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내려오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 안에는 네 발 가진 온갖 짐승을 비롯해 땅에 기어 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는 음성이 들렸는데, 베드로는 이를 거절합니다. 그것들은 율법에서 부정한 것으로 분류된 짐승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음성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 반복되었습니다(행 10:16). 성경에서 ‘세 번’은 ‘일곱 번’과 더불어 완전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런 일이 세 번 반복되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부정한 음식에 대한 규례가 완전히 폐기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먹을 수 있도록 주신 음식물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습니다(롬 14:14, 20). 이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기 때문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는다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딤전 4:4). 다만 무엇을 먹을지는 문화적 배경과 개인의 신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해도, 당시의 문화적 상황이나 개인의 신념에 따라 특정 음식을 먹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음식을 부정하다고 여겨 피하는 것과 다릅니다. 먹을 수 있지만 먹지 않는 것과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는 것의 차이로 볼 수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부정한 음식에 대한 규례는 이미 폐기되었으며, 더 이상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음식에 관한 율법의 규정을 따르려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유대교의 한 분파인 에세네파(Essenes)의 영향을 받아 부정한 음식이나 육식을 피함으로써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딤전 4:3). 그러나 음식 자체는 신앙생활에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것은 육체에 속한 것이며, 마음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히 9:10). 따라서 음식이나 그에 따른 규례를 지킨다고 해서 신자의 마음이 거룩해지거나 온전해지는 것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히 7:19).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히 13:10).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외적인 규례나 형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히 7:25; 10:22). 그리고 그 은혜 안에 항상 머물러 있어야 하며(행 13:43), 날마다 그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교훈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진리의 말씀 위에 굳게 설 수 있습니다.
3.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10절에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란 율법 아래에 머물며 구약의 제사 제도를 계속 지키려는 자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제사장들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는 제사장들이 제단 곁에서 희생 제물의 일부를 먹었습니다(레 6:16; 7:6).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새 언약의 제단에서는 그들에게 먹을 권한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11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구약에서는 매년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이 희생 제물 곧 수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을 위하여 속죄했으며, 그 희생 제물의 시체는 영문 밖, 곧 이스라엘 진영 밖에서 불살라졌습니다(레 16:27). 그와 같이 예수님께서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기 몸을 인간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들을 거룩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온전하게 하셨습니다(히 10:14). 따라서 구약의 제사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새 언약의 제단에 참여할 수 없으며, 거룩해지거나 온전하게 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다’라는 10절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제사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그림자일 뿐입니다(히 10:1). 그럼에도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그림자인 제사에만 집착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참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만이 그 안에서 참된 구원과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13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문 밖에 있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당시 십자가는 가장 수치스럽고 잔혹한 형벌로 고난과 치욕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지고 빌라도 법정에서부터 형장인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에 계신 그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는 의미로, 단순한 권면이 아닌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감수해야 할 일입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롬 8: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은 고난의 길이고, 치욕의 길이기에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그 길을 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고(요 14:6), 영구한 도성 곧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히 12:22)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히 13:14). 예수님께서는 화려한 예루살렘 궁정이 아니라 영문 밖에 있는 골고다 언덕, 그 고통과 치욕의 자리에 계십니다. 하지만 그곳에 참 평안이 있고, 진정한 안식이 있습니다(요 16:33).
4.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속죄를 위해 제사장들이 짐승을 희생 제물로 드렸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제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히 9:12; 10:12). 그렇다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비록 피 흘림의 제사는 끝났지만, 그 대신 신령한 제사 곧 영적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롬 12:1; 벧전 2:5).
영적 제사란 첫째, 찬송의 제사입니다. 15절에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을 의미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한다면, 이는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라’는 로마서 10장 9절의 말씀과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 15절의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께 찬송의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를 잊지 말고 날마다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둘째, 선행의 제사입니다. 16절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의미입니다(마 5:16). 찬송의 제사는 단지 입술의 고백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반드시 삶의 열매 곧 선을 행하고 가진 것을 서로 나누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특별히 나눔을 강조한 이유는 당시 성도들 가운데 재산을 몰수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등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히 10:34).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서로 나누어 주는 행위는 단순한 선행을 넘어 신앙 공동체를 지탱하는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5.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17절 말씀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원문에 보면 이 말씀 뒤에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가 나옵니다. 왜 교회 지도자들에게 순종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에게 순종해야 할 이유는, 그들이 성도들의 영혼을 위해 늘 기도하며, 마치 자신이 그 영혼에 대해 책임져야 할 사람인 것같이 그 사역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히 13:17). 그러므로 성도들은 교회 지도자들이 즐거움으로 그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고, 근심으로 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도들은 지도자들의 권위를 존중하고 그들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사역할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하며(히 13:18), 그 사역에 적극 협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결국 성도 자신에게도 유익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결코 한 사람만으로 세워지거나 움직이는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골 1:18)를 중심으로 각 지체가 서로 협력하고 유기적인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건강하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들을 존중하고 그 사역을 위해 기도하며, 우리 각자가 맡은 자리에서 충성을 다할 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골 1:24)는 더욱 견고히 세워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공동체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