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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yeum 2025. 8. 7.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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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장 1절 ~ 12절 [개역개정]

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3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7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10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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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죄인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음에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이며, 그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롬 3:20). 타락한 인간이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것이 가능했다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고(갈 3:21),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갈 2:21). 이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의(롬 10:3), 곧 율법의 행위로 구원에 이르려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그분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라고 생각했는데(롬 10:2), 이는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은, 잘못된 열심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백성을 어떻게 하셨을까요? 자기 백성을 버리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롬 11:1).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롬 10:21).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을 예로 듭니다. 그 역시 아브라함의 후손이자 이스라엘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입니다(롬 11:1). 만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셨다면, 바울 또한 구원에서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으로 이끄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사도로 세우셨습니다(롬 1:1).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남겨 두신 자들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 엘리야 시대에 있었던 한 사건을 인용합니다. 엘리야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당시 북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왕후 이세벨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멸하려 했고, 백성들 또한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고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고소하며,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롬 11:3; 왕상 19:10, 14) 그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라고 하셨습니다(롬 11:4; 왕상 19:18). 칠 천명은 전체 인구에 비하면 극히 적은 수에 불과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멸망을 향해 치닫던 상황 속에서도 그들을 남겨 두심으로써 자신의 언약을 여전히 유지하고 계셨음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칠천 명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들은 타락한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끝까지 지킨 자들이었습니다. 비록 이들은 소수이긴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왔습니다.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하여 물로 심판을 받을 때도 노아와 그 가족은 구원받았습니다. 그들은 아합 시대의 칠 천명처럼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자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노아를 가리켜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했습니다(창 6:9). 그러나 이것이 노아에게 전혀 죄가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무리 의롭다고 해도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전 7:20). 따라서 노아를 가리켜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한 것은 당시 타락한 시대적 상황에서 그래도 노아만큼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노아가 살던 시대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을 정도로(창 6:6) 사람들의 죄악이 가득한 때였습니다(창 6:5). 사람들의 생각은 언제나 악했으며, 그들의 삶은 완전히 부패했습니다(창 6:12). 이러한 시대에 노아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려고 힘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노아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창 6:8), 그로 인해 노아의 가족은 홍수 심판으로부터 유일하게 구원을 받았습니다(벧전 3:20).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롬 11:5). 은혜(헬, 카리스)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를 뜻하고, 택하심(헬, 에클로게)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은혜로 택하심’이란 인간의 어떤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긍휼에 따라 값없이 선택하셨다는 의미입니다(롬 3:24; 엡 2:8; 딛 3:5).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며(딛 2:11), 그 은혜에 믿음으로 응답한 자들(엡 2:8; 히 4:2) 곧 복음에 순종한 자들을(롬 10:16)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셔서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롬 11:6; 엡 2:9). 이 구원의 은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세상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누구든지 믿음으로 받기만 하면 됩니다(롬 3:22). 하지만 유대인들은 대부분 구원을 율법의 행위로 얻으려 했기 때문에, 그들이 추구했던 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롬 11:7 상).

이에 대해 바울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롬 11:8). 이 말씀은 이사야서 29장 10절과 신명기 29장 4절을 종합하여 인용한 것으로 얼핏 들으면,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시고 눈과 귀를 닫으셨기 때문에 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거부하고 율법의 행위를 통한 구원을 추구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완악한 상태에 머물기를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두셨다는 의미입니다(롬 1:24, 26, 28). 이어지는 구약의 인용은 이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롬 11:9, 10). 이는 다윗의 시편을 인용한 것으로,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다윗의 대적자들은 그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그를 조롱하고 멸시함으로 그의 고통을 더했습니다. 이를 다윗은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다”라고 고백합니다(시 69:21). 이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과 같으며,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소다 위에 식초를 부음과 같습니다(잠 25:20).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지만(마 27:34, 48), 다윗 역시 그러한 고통을 실제로 겪었습니다. 이에 다윗은 자신을 조롱하고 핍박하는 자들에 대해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시 69:22-23)라고 간구했습니다. 바울은 이 구절을 통해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자초한 결과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심판을 받아 넘어졌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원히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롬 11:11). 만일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에 비유함으로써(롬 11:15), 그것이 단순한 회복이 아닌 영적 대각성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말세에 실제로 일어날 것입니다(롬 11:26). 또한,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인해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확장되었고, 그 결과 이방인들은 풍성한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롬 11:12). 바울은 이 같은 구속사의 흐름을 감람나무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감람나무는 포도나무와 함께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과실수로, 성경에서 평화와 번영, 기쁨과 승리 등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시 52:8; 128:3; 렘 11:16).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재배된 감람나무뿐만 아니라 야생에서 자라는 감람나무, 즉 돌감람나무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돌감람나무를 이방인에, 그리고 재배된 감람나무 곧 참감람나무를 유대인에 비유했습니다. 그는 참감람나무 가지들 가운데 얼마가 꺾이고, 그 자리에 돌감람나무인 이방인이 접붙임을 받아 참감람나무뿌리에서 나오는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롬 11:17). 보통은 참감람나무 가지를 돌감람나무에 접붙이지만, 바울은 이와 반대로 설명했습니다. 이는 그가 식물에 대해 잘 몰라서가 아니라 의도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방인이 본래 원가지가 아니라는 점과 그들이 언약에 참여하게 된 것은 그들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가 꺾였다는 것은, 그들이 구원의 은혜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들이 복음에 순종하지 않고, 율법의 행위로 자기 의를 세우려 했기 때문입니다(롬 10:3). 반면에, 이방인이 그 자리에 접붙임을 받은 것은 그들이 믿음으로 복음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즉, 유대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였고, 이방인은 믿으므로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롬 11:20). 이는 구원이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단지 유대인이라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구원받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으며, 그 은혜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돌감람나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스스로는 결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었고,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지 않았다면 마땅히 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딤전 2:4; 벧후 3:9)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우리는 그 은혜에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롬 11:20). 곧,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한 자가 된 것입니다(엡 3:6).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구원과 단절된 채 살아가다가 결국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한시라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