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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yeum 2025. 9. 4.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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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3장 1절 ~ 10절 [개역개정]

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3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5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6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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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네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입니다. 이는 헌법에 명시된 것으로,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 의무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성도에게도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의무를 크게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1. 국가에 대한 의무

바울은 1절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권세들’은 국가의 공적인 권위를 가진 자들을 가리킵니다. 당시에는 로마 황제를 비롯해, 각 지역을 다스리던 총독이나 관리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들에게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권세를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국가라는 통치 제도이며, 그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권세이지, 단순히 통치자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바울 당시의 로마 황제는 네로였습니다. 그는 적그리스도라 불릴 만큼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악명 높은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직접 황제로 세우신 것일까요? 그래서 비록 그가 악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그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네로를 황제로 세우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로마의 황제라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은 국가라는 통치 제도이며, 그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권세이지 네로 개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왕이나 총독에게 하라”고 했습니다(벧전 2:13, 14). 따라서 성도는 그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국가의 공적인 권위를 가진 자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롬 13:2). 왜냐하면 그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곧 그 권세를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의 명령이 성경의 가르침과 충돌할 때는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행 4:19; 5:29).

바울은 다스리는 자들이 “선한 일이 아니라 악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된다”라고 했습니다(롬 13:3 상). 이 말은 통치자들이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운 존재이지만,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법을 지키고 선을 행한다면 그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롬 13:3 하). 이어서 바울은 다스리는 자들을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불렀습니다(롬 13:4). ‘사역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는 ‘섬기는 자’ 곧 ‘사환’을 뜻합니다. 교회에서는 이 단어를 ‘집사’라는 직분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습니다. 통치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국가라는 제도 안에서 권세를 위임받아 선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은 개인 차원의 선행이 아니라, 사회 질서와 정의를 바로 세우는 공공의 선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칼’, 곧 악을 행하는 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따라 즉 하나님을 대신하여 법을 집행하는 하나님의 사역자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권세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단지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양심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롬 13:5). ‘양심’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도덕적 의식을 말합니다(롬 2:15). 그런데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양심은 단순한 도덕적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는 성도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조세, 곧 세금을 바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롬 13:6). 사람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발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분이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한다는 것이었습니다(눅 23:2).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마 21:17)라고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황제인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만 했습니다. 세금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인두세(κῆνσος)였습니다. 이는 매년 유대인 성인 남자에게 부과되었던 성전세(출 30:13)와 유사하며, 오늘날의 주민세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는 말씀을 왜곡하여 마치 예수님께서 모든 세금(φόρους, pl)을 반대하신 것처럼 빌라도에게 고발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로마에 바치는 조세나 유대 당국이 부과하는 세금을 반대하신 적이 없습니다(마 17:24-27). 바울 또한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했습니다(롬 13:7).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세상이 끝날 때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이나 베드로는 당시 성도들에게 국가 권력이나 사회 제도에 순종하라고 권면했을까요? 당시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그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고통받고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당시 성도들 가운데 로마 제국에 대항하거나 그들이 부과하는 세금을 거부하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B.C. 63년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게 되면서, 유대 사회에는 로마 지배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단체가 A.D. 6년경 갈릴리 사람 유다가 조직한 것으로 알려진 셀롯이라는 무장 단체입니다(행 5:37). 그들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왕이라는 신앙을 바탕으로, 로마 황제 숭배를 거부했고, 로마에 세금 바치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모독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인 시몬도 이 단체의 당원이었습니다(눅 6:15). 이런 하나님 유일사상은 유대인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아가 예수님만을 주로 고백했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주’는 곧 황제를 의미했기에, 예수님만을 ‘주’라 고백하는 것은 로마 제국과 황제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로마 정부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로마 정부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반역자로 몰려 처단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성도들이 괜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권세에 복종할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같은 의미에서 성도들에게 그런 권면을 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국가 권력이나 사회 제도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질서이며,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대해 ‘주를 위해서’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으로 따라야 합니다. 성도는 모든 일을 진리 안에서,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요삼 1:4).

2. 사회에 대한 의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모든 계명은 십계명으로 요약되며, 십계명은 크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마 22:37-39).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사랑을 규정하고,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는 인간 상호 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비록 인간에 대한 사랑의 계명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보다 뒤에 위치하지만, 두 계명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마 22:39). 이웃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구체적 증표이며,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연장입니다. 그래서 십계명 중에 하나라도 어기게 되면 십계명 전체를 어기는 것이 됩니다(약 2:10). 그런데,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하나님께 대한 사랑보다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제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막 10:17),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가운데 이웃 사랑에 대한 부분만을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막 10:19) 십계명에는 ‘속여 빼앗지 말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탐내지 말라’는 계명의 구체적인 사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탐심은 결국 불의한 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에는 “속여 빼앗지 말라” 대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레위기의 계명(레 19:18)이 덧붙여져 있습니다(마 19:19). 예수님께서 “영생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사람에게 이웃 사랑의 계명만을 말씀하신 이유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볍게 여기던 유대인들에게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본질적으로 같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요일 4:20).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마 10:42). 여기서 ‘작은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자들을 가리키며(마 10:41), 넓게는 사회적 약자들을 포함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한 것이 곧 자신에게 한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마 25:40). 이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뜻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바울 역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룬 것이다”라고 말합니다(롬 13:8). 즉,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하는 것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 안에 모두 포함되었다는 것입니다(롬 13:9).

이어서 바울은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선언합니다(롬 13:10 하). 이는 율법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에, 그 사랑 안에서 율법이 온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데에서부터 시작됩니다(롬 13:10 상). 어느 이방인이 힐렐이라는 유대 랍비를 찾아와 자신이 외다리로 서있는 동안 율법 전체를 가르쳐 주면 유대교인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힐렐은 “남이 당신에게 하기를 원치 않는 일을 당신도 남에게 하지 말라 그것이 율법의 전부요 기타는 다 주석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하기를 원치 않는 일이나, 불쾌하게 여기는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는데(마 7:12) 같은 맥락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사랑의 적극적인 실천을 말씀하신 것이고, 바울은 사랑의 소극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했습니다(롬 13:8). 이 말은 성도가 이 땅에 살면서 갚지 않고 남겨두는 빚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빚을 준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빚만큼은 예외입니다. 헬라어에서 ‘빚을 지다’라는 단어는 ‘의무를 지다’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빚은 지지 말아야 하지만, 사랑의 의무는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요 13:35).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요일 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