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um 2025. 9. 28.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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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4편 1절 ~ 10절 [개역개정]

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5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설교문 보기

시 24편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영광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본 시의 저자로 알려진 다윗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고백합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이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창 1:1). 세상 만물은 우연히 생겨난 것도 아니고, 수백만 년의 진화를 거쳐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히 3:4).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히 11:6).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히 11:3).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이 세상은 기존에 있었던 어떤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로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우리는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잘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의심 많은 도마처럼 뭔가를 보기 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눈에 보이는 표적을 원했습니다(고전 1:22). 그러나 눈에 보이는 걸 믿는 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것, 그것이 참된 믿음입니다(요 20:29).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했습니다(롬 8:24).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눈으로 볼 수도 없지만,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그러기에 소망은 믿음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소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시고,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라고 노래합니다(시 24:2). 이는 창세기 1장 2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그때의 땅은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채, 흑암에 싸여 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다윗이 말한 ‘바다와 강들’은 바로 그 공허와 혼돈의 상태를 가리키며, 그 위에 하나님께서 질서와 기초를 세우셨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기에 그 안에 사는 자들은 모든 하나님의 것이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골 1:16).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의 죄로 인해 인류는 그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롬 3:23; 5:12),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겠습니까(시 24:3)? ‘여호와의 산’은 곧 ‘시온산’을 가리키며, 그곳에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이 있었습니다(사 8:18). 따라서 ‘여호와의 산에 오른다’와 ‘그의 거룩한 곳에 선다’라는 표현은 모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인데, 어떻게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다윗은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시 24:4). 이는 네 가지 부류의 사람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은 한 사람 곧 ‘마음이 청결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란 거짓이 없는 순수한 마음을 지닌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모든 행동은 마음에서 비롯되기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헛된 생각을 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과 행동에서도 조심스러움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장로들의 전통에 따라 손 씻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이란 구전 율법을 집대성한 미쉬나를 말하는데, 그 규정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주 손을 씻어야 했고, 특히 식사할 때는 반드시 손을 씻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씻지 아니한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 전통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스라엘은 건조한 기후로 인해 먼지가 많았으므로 위생상 손을 자주 씻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 씻을 수 있도록 공공장소(요 2:16)는 물론 가정마다 항아리에 물을 담아 두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단순히 위생 때문이 아니라 부정함을 피하기 위한 종교적 의식으로 손을 씻었습니다. 그들은 이를 통해 자신을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보이려 했으며, 심지어 손을 씻지 않는 사람과는 함께 식사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부정한 사람과 함께 하면 자신 또한 부정해질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전통을 잘 따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어깁니까” 하고 따져 묻자, 예수님께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5:1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음식이며,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 말과 행동입니다. 곧 마음속 악한 생각들이 살인, 간음, 음행, 도둑질, 거짓 증언, 비방 등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5:20).

사람이 어떤 규정을 지켰다고 해서 곧 선한 사람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과 동기가 순수하지 않다면 그것은 오히려 위선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하거나 성경을 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기쁨이나 만족 혹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기 위함이라면 그것은 불순한 동기에서 비롯된 위선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거짓 없이 행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마음이 청결한 자’이며, 다윗은 그가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시 24:4).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형식적인 종교 행위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삶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겉모습보다 중심을 보시며(삼상 16:7), 우리의 행위가 진실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살피십니다(잠 20:27).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8). 따라서 마음이 순수하고 거짓이 없는 자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분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죄성을 지닌 인간이 과연 청결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렘 17:9), 누가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사 59:2). 하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막’입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죄인과 만나시기 위해 친히 마련하신 은혜의 장소로서,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약도와 같습니다.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약궤입니다. 그 안에는 증거판, 곧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이 들어 있고, 그 위에 덮개인 속죄소가 놓여있습니다(출 25:21).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25:22). 이 언약궤는 성소의 가장 안쪽에 있는 지성소에 두었는데(출 26:33),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휘장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출 26:33). 이 휘장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단절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휘장을 통해야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고, 또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자기 자신과 백성의 죄를 위해 드리는 피를 가지고 들어가야 했습니다(히 9:7). 이러한 규례를 어기면 비록 대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죽임을 면치 못했습니다(레 16:2).

이런 일을 매년 반복해야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자유롭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히 9:8). 그런데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셨을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마 27:51). 히브리서 기자는 이 휘장이 예수님의 육체라고 했습니다(히 10:20). 따라서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완전히 제거되었음을 의미합니다(엡 2:14). 이제 더 이상 짐승의 피는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했던 제사장도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단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히 9:12).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분의 피를 힘입어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분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 10:19).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롬 3:24). 본문 5절은 바로 이러한 자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결국 다윗이 말한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란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곧 여호와를 찾는 백성이고, 야곱의 하나님께 경배하는 자들입니다(시 24:6).

그러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실까요? 그분은 바로 ‘영광의 왕’이십니다. 7절부터 마지막 10절까지는 영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여기서 ‘문’은 예루살렘 성문을 가리키며, ‘머리를 든다’는 것은 문을 활짝 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은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성문이 열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시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예루살렘 입성을 예표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며칠 앞둔 주일에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때 명절을 지키기 위해 와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승리의 상징인 종려가지를 흔들면서 그를 맞으러 나왔습니다. 그들은 '이제 구원하소서'(시 118:25)라는 뜻의 ‘호산나’를 외치며(마 21:9, 요 12:13),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이 장면은 전쟁에서 승리한 왕이 개선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시 24:8). 고대에는 왕이나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성문이 활짝 열리고 백성이 환호하며 맞이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개선장군처럼 위풍당당한 모습이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서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으로 입성하셨습니다(사 9:6; 슥 9:10 ;눅 19:42). 그리고 세상의 영광이나 권세를 추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모두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며,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 2:9-11).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해야 합니다(고전 10:31). 그것이 곧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미 6: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많은 제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산 제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롬 12:1). 종교의식으로서의 예배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 자체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요 4:24)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형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이나(창 4:7),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를 거부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암 5:21-2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삶으로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는 고난과 수치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승리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마 16:24). 예수님께서 온유하고 겸손하신 마음으로(마 11:29),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삶으로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 곧 영광의 왕을 바라보며 우리도 믿음과 순종으로 그리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그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