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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나이다

yeum 2025. 10. 2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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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6편 1절 ~ 12절 [개역개정]

1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3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4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5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6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7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8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9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10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11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2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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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6편은 다윗이 자신의 정결함을 하나님께 호소하며,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한다는 고백의 시입니다. 그는 먼저 자신이 ‘완전함에 행하였다’라고 말합니다(시 26:1 상).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무결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직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노아에 대해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했지만(창 6:9), 그는 술에 취해 추태를 보이는 연약함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창 9:21).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자신의 완전함을 언급한 것은, 자기가 겪고 있는 부당함을 하나님께 호소하기 위함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지만, 종종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물론 자신의 죄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악인들로부터 받는 부당한 고난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본문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다윗이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시편 7편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을 ‘의로우신 재판장’이라 부르며(시 7:11),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기를 간구한 바 있습니다(삼상 24:15).

이를 위해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피시고 시험하사, 자신의 뜻과 양심을 단련해 주시기를 원했습니다(시 26:2). 자신이 정말 완전함 가운데 행하였는지를 하나님께서 친히 시험하시고 철저히 검증해 주시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의 완전함이 무엇인지를 3절 이하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 가운데 행했습니다.

3절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여기서 인자는 히브리어로 ‘헤세드’, 즉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그 사랑을 늘 기억하며,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바르게 살고자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자에게서 마땅히 나타나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행 26:20).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했으며(삼하 8:15),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살고자 힘썼습니다(왕상 15:5). 물론 그 역시 허물이 많은 인생이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내 마음에 맞는 사람’(행 13:22)이라 하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시 51:6). 우리도 다윗처럼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삶이 완벽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힘쓸 때,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보시고(삼상 16:7) 우리를 기쁘게 받아 주실 것입니다.

둘째, 허망하고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4절입니다.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허망한 사람’이란 ‘뜻을 허탄한 데에 두는 자’, 곧 헛된 것이나 무가치한 것을 따르는 자를 가리킵니다. 성경은 이러한 ‘헛된 것’의 대표적인 예로 우상을 들고 있습니다. 우상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섬기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 놓은 헛된 존재에 불과합니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볼 수 없으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맡지 못합니다(시 115:5-6). 그런 것을 어찌 신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여전히 그 우상 앞에 복을 빌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자들이 허망한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그들과 ‘같이 앉지 않았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자리를 함께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과 교제하거나 그들이 하는 일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또 다윗은 ‘간사한 자와도 동행하지 않았다’라고 했습니다. ‘간사한 자’란 ‘위선자’를 말하며, 이들은 거짓과 허위를 일삼는 자들입니다. 다윗은 그들의 위선을 따르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위선자는 대부분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유익을 더 앞세웠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치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처럼 가장하여 사람들을 속였습니다(겔 22:28; 마 23:27-28).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 경고하셨습니다(마 23장). 따라서 우리는 허망한 사람들과 간사한 자들을 가까이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바른 길로 행할 수 있습니다.

셋째, 악한 자를 멀리했습니다.

5절입니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다윗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멀리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함께 모이는 것조차 싫어했습니다. 그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악을 도모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롬 1:30). 그런 자들과 같이 앉는 것, 곧 그들과 함께하는 것은 그들의 죄에 참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자들을 가까이하지 말고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야 합니다.

넷째, 깨끗한 손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6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손을 씻는 행위는 제사를 드리기 전에 행하는 정결 의식을 의미합니다(출 40:31). 다윗이 ‘무죄하므로 손을 씻었다’라고 한 것은, 단지 형식적으로 결례를 행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실제로 정결했음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는 악한 자들과 함께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 가운데 행함으로 자신의 무죄함을 삶으로 증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한 영적 예배, 곧 삶으로 드리는 예배라 할 수 있습니다(롬 12:1). 그리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녔다’는 표현은 아마도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단 주위를 돌며 여러 의식을 행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물론 다윗이 직접 제사를 드린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행해지는 예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거기서 감사의 소리를 들려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시 26:7). ‘감사의 소리’란 ‘감사의 찬송’이라는 뜻으로, 다윗은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의 예배를 드리기 원했습니다. 감사와 찬양은 예배의 일부가 아니라 예배의 본질입니다(시 50:23; 100:4).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의 모습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마음으로 ‘주의 집을 사모하며,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시 26:8). 여기서 ‘주의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은 모두 성전을 가리킵니다. 물론 당시에는 성전이 아직 건축되기 전이라 성막이라 불렸지만, 형태만 다를 뿐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다윗이 성전을 사랑한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눈에 보이는 성전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다윗은 하나님께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시 26:9). 이는 자신이 악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왔기에, 그들과 함께 형벌을 받지 않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만일 그가 악인들과 동일하게 심판을 받는다면, 그것은 선과 악을 분명히 구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과 모순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이러한 진리를 확신하며, 담대히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이어서 다윗은 악인들과 자신의 삶을 대조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합니다.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시 26:10-11) ‘사악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짐마’는 문맥에 따라 일반적인 계획을 뜻하기도 하고, 악한 계획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악한 계획은 마음속에 머물러 있을 때는 그냥 생각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실제 행동으로 옮겨질 때 비로소 악행이 됩니다.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다’라는 표현은, 바로 이 마음속 계획이 행동으로 드러난 결과를 묘사한 것입니다. 특히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다’라고 한 것은 그들의 부패가 심각하고 만연한 상태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의 정체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뇌물은 보통 일반 백성보다는 재판관이나 관리 등 권력층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이 말하는 악인들은 불의한 재판관이나 부패한 관리 등을 가리킵니다. 종교 지도자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부패는 사사시대로부터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무엘의 아들들입니다. 그들은 사사로서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않았으며, 이익에 눈이 멀어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했습니다(삼상 8:3).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백성들로 하여금 왕을 요구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했습니다(삼상 8:5). 만일 이러한 불의한 일들이 다윗이 왕이었을 때 벌어졌다면, 그는 결코 이를 좌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러한 불의 앞에서 단지 하나님께 호소할 수밖에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시편 26편은 그가 왕이 아니라 사울에게 쫓기던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윗은 그런 불의한 일을 수없이 겪었으나, 그때마다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시 26:1 하), 자신의 완전함에 행하려고 힘썼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겠다고 고백했습니다(시 26:11 상). 이는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교만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완전함’은 ‘도덕적 완전함’보다 ‘성실함’, 혹은 ‘진실함’을 의미합니다(창 20:5; 시 7:8).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삼하 8:15),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고자 힘썼습니다(왕상 15:5).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완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상대적일 뿐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죄인입니다(전 7:20; 롬 3:23). 다윗 역시 그러한 존재였기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간구했습니다.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시 26:11 하). ‘속량’이란 ‘구속’과 같은 의미로, 노예나 전쟁포로, 죄수 등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지불하는 몸값이나 그 행위를 말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속량’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노예가 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주신 사건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죄의 노예가 된 인류를 속량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히 9:15). 그러나 다윗이 ‘속량’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여기서 ‘속량’은 값을 치른 행위 자체보다 하나님의 소유로 되찾아 주심을 강조한 것입니다. 곧 자신을 죄인들과 함께 멸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속한 자로 구별해 주시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시 26:12)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다’라는 표현은 완료형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안전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시 31:8). 다윗은 아직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그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1:24).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 확신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믿음입니다. 물론 그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이어야 합니다(약 4:3). 다윗은 그렇게 기도했고, 그 기도가 응답된 후 가장 먼저 하려고 했던 일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무리 가운데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에 마음을 두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 자신을 다스렸고, 악인들과 허망한 자들의 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늘 자신의 손을 깨끗이 하며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했고,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힘썼습니다. 다윗은 우리처럼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이었지만, 늘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고자 했으며,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 가운데 행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불의한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했습니다. 기도가 아직 응답되지 않았을 때라도, 다윗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말씀을 따라 정직하고 진실하게 행해야 합니다. 세상의 헛된 것과 간사한 길을 멀리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아직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더라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반석 위에 세운 집처럼 견고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윗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