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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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9편 11절 ~ 19절 [개역개정]
1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2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3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5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6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
7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9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10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1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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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9편은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위엄과 주권을 선포하는 시로, 우리가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먼저 이 시의 저자로 알려진 다윗은 권능 있는 자들을 향해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라고 말합니다(시 29:1). ‘권능 있는 자들’이란 천상의 존재들이나 세상의 통치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그들에게 명령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상의 존재들은 하나님의 명령만을 수행할 뿐 사람의 지시는 따르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 역시 하나님께 영광과 능력을 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오직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 영광을 가로채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구약의 두로 왕과 신약의 헤롯 아그립바 왕을 들 수 있습니다.
두로는 항구와 섬으로 이루어진 도시국가로 해상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사 23:8; 겔 27:25). 특히 섬은 난공불락으로 여겨질 만큼 아주 견고했습니다. 이로 인해 두로 왕은 스스로 ‘나는 신이라’ 할 정도로 그 교만이 하늘을 찔렀습니다(겔 28:2). 자신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써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챈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며(겔 28:2), “너를 땅에 던져 구경거리가 되게 하고(겔 28:17), 불로 살라 재가 되게 하겠다(겔 28:18)”고 선언하셨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왕도 두로 왕 못지않았습니다. 공교롭게도 그의 교만은 두로와 관련 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해안 도시로 무역 중심의 산업이 발달한 반면 농지가 적어, 식량을 대부분 수입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식량은 헤롯 왕의 영토에서 공급받고 있었습니다(행 12:20). 그런데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헤롯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헤롯이 그들에게 공급하던 식량을 중단하자,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헤롯과의 화친을 요청했습니다. 그리하여 날짜가 정해졌는데,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날은 로마 황제의 생일이었고, 장소는 헤롯 대왕이 건설한 대극장이었다고 합니다. 헤롯은 왕의 의복을 입고 연단에 앉아 연설했습니다. 그러자 두로와 시돈에서 온 사람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라고 하면서 갈채를 보냈습니다(행 12:22). 물론 그들의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렇게 함으로써 헤롯의 환심을 사려고 했던 것입니다. 헤롯은 그런 줄도 모르고 자기에게 주어진 신적인 영예를 당연한 듯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그때 헤롯은 심한 복통으로 발작을 일으켰고 5일 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행 12:23). 결국 헤롯 아그립바가 죽은 것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차지하려는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교만은 권세 있는 자들에게서 쉽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천상의 존재였던 사탄도 교만 때문에 타락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딤전 3:6). 다윗은 그런 이들을 향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과 능력을 돌리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교만은 신앙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적입니다. 아무리 신실한 사람이라도 그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정작 이 말을 했던 다윗도 교만으로 인해 징계를 받았습니다(삼하 24:10-12). 다윗 못지않은 믿음을 가졌던 히스기야도 한때 교만하여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않았다가 큰 어려움에 처할 뻔했습니다(대하 32:25). 또 교만은 신앙의 눈과 귀를 멀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서로 누가 더 큰가를 놓고 논쟁을 벌였고(막 9:34), 심지어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눅 22:24). 이에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막 9:35), 교만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 이후에 제자들은 달라졌을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 그들은 성령 강림의 약속(행 1:5)을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으로 오해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줄곧 이스라엘의 독립과 회복 그리고 자신들의 출세에 대한 환상에 빠져 있었습니다(막 10:37).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더불어 그들의 기대는 무너졌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서 권력에 대한 기대가 되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교만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조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나는 괜찮겠지’ 하고 방심하는 순간 넘어집니다(고전 10:12). 바울처럼 교만의 빌미를 제공하는 모든 것을 멀리하고(빌 3:8), 겸손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마 20:28).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높아지려 하거나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어서 다윗은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고 명령합니다(시 29:2 상).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전인격을 나타냅니다(전 9:5).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름을 지을 때 보통 부모의 소망을 담았고, 태어날 때의 신체적 특성이나 상황을 반영하여 짓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베냐민은 그의 아버지 야곱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야곱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었는데, 베냐민을 제외한 다른 아들들은 모두 그들의 어머니가 이름을 지었습니다. 사실 베냐민도 그의 어머니 라헬이 지어준 이름을 야곱이 바꾼 것입니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는데, 죽기 직전 아들의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란 뜻의 베노니라 불렀습니다. 태어날 당시의 비극적 상황을 반영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의 이름을 ‘오른손의 아들’이란 뜻의 베냐민이라 불렀습니다(창 35:18). 성경에서 오른손은 능력이나 권세 등을 상징했습니다. 따라서 베냐민이란 이름에는 베노니와는 달리 희망이 담겨있습니다. 야곱은 어머니 없이 자랄 베냐민이 의기소침하지 않고 힘 있게 살아가기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름을 직접 지어주신 특별한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이름이 ‘예수’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예수’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으로, 구약의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딤전 1:15).
하나님께도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여호와’입니다(출 3:15). 일각에서는 ‘야훼’라고 발음하는데, 사실 유대인들도 정확한 발음은 모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기 위해 ‘여호와’ 대신 ‘주(主)’라는 뜻의 ‘아도나이’를 사용했습니다. 당시 히브리어는 자음만 있었고, 오랫동안 하나님의 이름을 발음하지 않다 보니 결국 그 이름의 정확한 발음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도나이’나 ‘그 이름’이라는 뜻의 ‘하셈’이라 부르는데,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말하지 않는 전통을 지켜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이름은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4)라고 하신 선언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시작도 끝도 없으신 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느 9:5). 여호와는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온 세상을 주관하시며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은 마땅히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어지는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시 29:2 하)라는 명령이 그것을 설명해 줍니다. ‘거룩한 옷’이란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이 입는 예복을 가리킵니다. 그 예복은 세마포로 만든 옷으로(레 6:10; 16:32), 이를 입지 않고는 성전에서 봉사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거룩한 옷은 예배자가 하나님 앞에 설 때 갖추어야 할 경외심과 거룩한 행실을 상징합니다(대상 16:29). 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는데, 이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 곧 의로운 행위라고 했습니다(계 19:8). 하나님께서는 예배 자체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 임하는 자의 태도와 삶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전 문에 서서 하나님께 예배하러 들어가는 유다 백성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살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3-4) 성경에서 같은 말을 두세 번 반복하는 것은 강조를 의미합니다(사 6:3). 당시의 백성들은 불의를 행하고, 다른 신들을 섬기면서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성전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이 있고 그곳에서 예배가 계속되는 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들에게 성전은 더 이상 여호와의 성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로 인해 성전은 도둑의 소굴이 되어 버렸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렘 7:11). 당시 강도들은 외진 곳이나 광야의 굴 속에 은신처를 마련해 놓고 약탈을 했는데, 유다 백성은 성전을 마치 그런 소굴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은 온갖 죄악에도 불구하고 성전에 와서 제사를 지내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가서는 또다시 죄를 범했습니다(렘 7:10).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렘 7:21).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렘 7:23).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롬 12:1). 그런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예배는 참된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사 1:13). 삶으로 드리는 예배, 그것이 진정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합당한 예배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런 예배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자연 현상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과 섭리를 찬양합니다(시 29:3-9). 이는 모든 피조물이 왜 하나님께 영광과 능력을 돌리고 그분께 경배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3절부터 9절까지 반복되는 ‘여호와의 소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자연 현상을 통해 그 영광과 권능의 위엄을 보여주십니다(시 29:4). 3절은 천둥(욥 37:4 상), 5절과 6절은 강풍, 7절은 번개(욥 37: 하), 8절은 지진, 9절은 폭풍우를 묘사합니다. 이는 서로 다른 현상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태풍이나 허리케인처럼 천둥과 번개, 강풍과 비를 동반한 강력한 폭풍우가 지나가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이를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 어떠한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10절에 언급된 홍수는 노아의 홍수를 연상케 하는데,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모든 자연 현상을 주관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그 단적인 예를 우리는 마가복음의 한 사건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얼마쯤 가다가 갑자기 큰 폭풍이 일어나 파도가 배를 뒤덮었고 물이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막 4:37). 갈릴리 바다에서는 그런 일이 종종 있었고, 상당수가 갈릴리 어부 출신이었던 제자들은 그 위험이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배가 곧 가라앉을 위기에 처하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몹시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배의 뒷부분에서 태연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막 4:38). 이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자신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바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은 심히 두려워하며 “도대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바다도 그에게 순종하는가”하고 놀라워했습니다(막 4:41). 유대 전통에서 자연을 다스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었습니다(시 89:9).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행하시자 제자들은 혹시 예수님이 하나님이신가 생각했고, 하나님을 본 자는 반드시 죽는다(출 33:20; 삿 13:22)고 여겨왔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셨고(빌 2:6-7) 그러기에 자연도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대 사람들은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보고 그것을 주관하는 신들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특히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이라는 신이 자연의 변화를 일으켜 자신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알에게 분향하며 심지어 자기 자녀를 번제로 바치기도 했습니다(렘 32:35). 하지만 기상 변화뿐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며 그분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배할 대상은 하나님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그분께만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