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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2022.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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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7장 1절 ~ 7절 [개역개정]
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2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저마다 가족을 거느리고 가드에서 아기스와 동거하였는데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였던 갈멜 여자 아비가일과 함께 하였더니
4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
5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바라건대 내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다면 지방 성읍 가운데 한 곳을 내게 주어 내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에 살리이까 하니
6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7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산 날 수는 일 년 사 개월이었더라

설교문 보기

다윗은 아무 잘못도 없이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 자신을 사냥꾼의 먹잇감이 된 자고새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26:20). 언젠가 사울에게 잡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다윗으로 하여금 종종 두려움을 갖게 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더 이상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될 좋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사울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것도 2번씩이나 말이죠. 보통 사람들은 자기 손아귀에 있는 원수를 그냥 가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24:19).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죽일 수 없었습니다.

좋은 싫든 사울은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운 이스라엘의 왕입니다(24: 9, 11). 그런 사울을 죽이는 것은 곧 그를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기에 다윗은 그를 죽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26:9). 그리고 원수를 갚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라는 것(신 32:35 ; 롬 12:19)을 잘 알고 있었던 다윗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24:12 ; 266:23).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24:15).

이 일로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시는 다윗을 해하려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26:21). 하지만 다윗은 안심할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 사울을 살려주었을 때 그는 다윗이 왕이 될 것과 이스라엘이 그 손에서 견고히 설 것을 안다고 하면서 자신의 대를 끊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냈습니다(24:21, 22). 그럼에도 사울은 다윗 쫓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사울을 살려준 후 다시는 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에는 사울에게 붙잡혀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다윗은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은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도망하는 것 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일행을 이끌고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갔습니다.

전에도 다윗은 사울을 두려워하여 블레셋으로 도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죽음의 위협을 느낀 다윗은 거짓으로 미친 체하여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21:1-13). 비록 목숨은 건졌지만 하나님의 백성 그것도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참담한 일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다윗은 이스라엘 땅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또다시 블레셋 땅으로 들어간 것은 다윗의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1.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간 것은 사울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27:1). 전에도 같은 이유로 가드 왕에게 갔었습니다(21:10). 모압 땅으로 간 적도 있었는데 이스라엘을 벗어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22:3). 그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갓을 통해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22:5).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이 위험과 역경을 피해 언약의 땅과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 밖에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또다시 사울을 피해 블레셋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의 치욕적인 경험을 잊지는 않았을 텐데 그럼에도 또다시 가드 왕에게로 간 것은 그만큼 절박한 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록 사울의 손에서는 벗어났지만(27:4) 영적인 위기는 계속되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땅에 머무는 동안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 그리고 아말렉 사람 등 여러 민족을 침략했습니다. 그리고 전리품을 가지고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가면 그는 다윗에게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략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마다 다윗은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이라)"고 대답을 답했습니다(27:10). 다윗은 실제와는 다른 곳을 침략했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침략한 곳의 남녀를 포로로 잡아오지 않고 모조리 죽였습니다. 다윗의 이 같은 행동은 블레셋과 적대관계에 있는 유다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우호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죽였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행동을 숨김과 동시에 아기스의 신임을 얻기 위한 것이었지만(24:12) 결국은 아기스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면 잠언 기자의 말처럼 올무 즉 덫에 걸리게 됩니다(잠 29:25). 죄의 유혹에 빠지기 쉽고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람의 말을 더 청종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경우를 성경에서 종종 보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대부분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일컫는 아브라함(롬 4:11)은 기근으로 인해 이집트로 내려갔었는데 그때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사라로 인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창 12:13). 실제로 사라가 아브라함의 이복동생이기 때문에 누이라고 한 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창 20:12) 이집트 사람들을 두려워하여(창 20:11) 아내를 아내라고 얘기하지 못한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그로 인해 아브라함은 이방 사람에게 책망을 들어야 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창 12:18, 19 ; 20:9).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그랄에 거주할 때 똑같은 잘못을 범했습니다(창 20:2). 그렇게 수모를 겪었음에도 또다시 같은 잘못을 반목한 것은 그만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아버지의 전철을 밟았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이유로 아내 리브가를 누이로 속인 것입니다(창 26:7). 엄밀히 말하면 이삭과 리브가는 당숙과 종질 즉 5촌 관계이기 때문에 누이라고 한 것은 명배한 거짓말입니다. 이 일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이방 사람에게 책망을 받습니다(창 26:9).

다윗도 사울을 두려워하여 블레셋으로 피했다가 오히려 그곳 사람을 두려워하여 미친 체해야 했던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사울을 피해 블레렛으로 갔지만 아기스 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그들을 의지하면 죄의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사람이 기뻐하는 일을 하다가 결국은 수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당하는 수모야 칭찬받을 일이지만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그들을 의지하다가 수모를 당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이나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마 10:28) 그분을 우리의 도움으로 삼아야 합니다.

2.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블레셋은 이방 신들을 섬기는 민족으로 이스라엘과 항상 적대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블레셋으로 도망했으며, 거기서 1년 4개월을 머물렀습니다(27:7). 그곳에서 다윗은 가드 왕의 종으로 자처했으며(27:5 ; 28:2), 그의 머리 지키는 자 곧 시위대장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28:2). 이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우상을 섬기는 자와 연합을 한 꼴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고후 6:14). 신명기 22장에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있는데(신 22:10) 이는 소와 나귀를 한 멍에에 매어 밭을 갈지 말라는 뜻으로, 여기서 겨리는 함께 혹은 연합이라는 의미입니다. 외형에 큰 차이가 있는 소와 나귀를 한 멍에에 메워 밭을 갈게 하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짐승을 괴롭힐 목적이 아니라면 그렇게 할 농부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함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레 19장의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는 명령과 "두 재료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레 19:19)는 명령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택하여 자기 백성로 삼으신 하나님의 성민(신 7:6)으로 우상을 섬기는 이방 민족들과는 다른 구별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규정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고 그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고후 6:17).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과 세상 사람들은 전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의와 불법이 함께 할 수 없고, 빛과 어두움이 사귈 수 없으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일치될 수 없는 것처럼 성도와 세상 사람들은 결코 화합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믿지 않는 자 곧 블레셋의 가드 왕과 함께 하므로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돌아보지 않으셨다면 그는 씻을 수 없는 비극을 초래할 뻔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은 사울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블레셋 땅으로 가는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계속 이스라엘 땅에 남아있어야 했지만 죽음의 두려움 앞에 바람직한 못한 결정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다윗과 함께 하셨고 그를 도와주셨습니다. 이는 성도가 잠시 세상으로 나갔을 때에라도 하나님의 간섭과 보호하심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도 다윗처럼 어려움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해서도 안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다윗을 지켜주셨던 그 하나님을 우리의 도움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실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눈앞에 닥쳐온 어려움은 때로 우리를 절망 가운데 빠지게 하고 다윗처럼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그것을 행하기를 소원하지만 항상 죄의 법이 자신의 육신을 사로잡아 마음이 원하는 바를 못하게 한다고 괴로워했던 바울의 심정이 되곤 합니다.

그래도 다시 힘을 내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줄(롬 8:28)을 믿고 탕자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다윗을 모든 환란 가운데서 지켜주셨던 하나님, 그분 만을 바라보고 그분을 의지하므로 어떤 어려움도 잘 헤쳐 나가 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