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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2022. 7. 21.
성경본문 보기

사무엘상 30장 1절 ~ 6절 [개역개정]
1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2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에 이르러 본즉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4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5 (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6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설교문 보기

사울을 피해 블레셋으로 도망했던 다윗은 아기스 왕으로부터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전할 것을 요구받고 출전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자 자신의 동족과 전쟁을 해야 하는 비극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없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사도 바울이 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였습니다(롬 8:28).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였고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즉 좋은 일이든 슬픈 일이든 성공이든 실패든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는데 다윗의 삶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 두 왕국으로 분열이 됩니다. 한 민족 두 나라가 된 것입니다. 두 왕국이 멸망하기까지 북 이스라엘은 이백 년 동안 열아홉 명의 왕이 통치하였고, 남 유다는 삼백 오십 년 간 스무 명의 왕이 다스렸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으로 그는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가지 못하도록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벧엘과 단에 두고 그것을 섬기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해 주신 신이 여기 있으니 굳이 예루살렘에까지 가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백성들은 벧엘이나 단에 가서 그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이집트 땅에서 자신들을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하며 섬긴 것과 같습니다(출 32:4). 이렇게 여로보암은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숭배의 죄를 짓도록 했습니다. 여로보암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한 명도 예외없이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습니다(왕상 16:26).

남유다 역시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이들을 평가할 때 기준으로 삼는 왕이 있었는데 바로 다윗입니다. 즉 왕으로서의 삶과 업적을 평가할 때 다윗과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12대 왕인 아하스는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했다’(왕하 16:2, 3)고 평가했고,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 왕이나 요시야는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왕하 18:3)고 평가를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행 13:22) 헷 사람 우리아의 일만 빼고는 일평생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으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에 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왕상 15:5). 비록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불신앙적인 행동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그러기에 아기스 왕으로부터 이스라엘과의 출전을 요청받았을 때 무척이나 괴로웠을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삼상 9:16 ; 10:1 15:1). 사울을 죽이는 것은 곧 그를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기에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그것도 자신의 동족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다윗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동족상잔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시편 119편의 기자는 고난을 당한 것이 자신에게 유익이라고 했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시 119:71). 그런데 그 고난은 자신의 잘못된 삶에서 비롯되었습니다(시 119:67). 다윗 역시 많은 고난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도 적지 않습니다. 29장의 사건도 따지고 보면 다윗이 신앙 밖으로 나갔기 때문에 발생한 일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모압 땅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22:5).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이 어떠한 위험과 역경이 있어도 언약의 땅과 언약의 백성을 떠나서는 안된다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두려워하여 또다시 이스라엘을 떠나 블레셋 땅으로 갔다가 동족과 싸울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만일 다윗이 블레셋 편에 서서 이스라엘과 싸웠더라면 그는 백성들에게 반역자라는 비난을 받았을 것이고 왕위에 오르는 것 역시 반대에 부딪쳤을 것입니다. 그런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도와주셨습니다. 블레셋의 방백들로 하여금 다윗이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으신 것입니다. 비록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블레셋으로 도망쳐 위기를 자초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긍휼히 여기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결국 모든 일이 유익하게 됩니다. 시편 기차처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도 하고 다윗처럼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지나온 삶 그리고 앞으로의 삶 속에서 고난이나 심지어 실망이라고 생각했던 것조차도 결국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렵다고 누구를 원망하거나 힘들다고 불평하지 말고 고난 속에서도 감사할 수 그런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동족상잔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위기가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다윗의 일행이 참전한 사이 그들이 거주하고 있던 시글락이 아말렉 사람들에 의해 노략을 당한 것입니다. 그들이 이르러 본즉 성읍은 불타고 아내들과 자녀들은 사로잡혀 갔습니다. 다윗과 그와 함께한 사람들은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습니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격분한 사람들은 다윗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이 생긴 원인이 다윗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시글락을 비워 둔 채 아기스 왕을 따랐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고 그 책임은 전적으로 지도자인 다윗에게 있다고 본 것입니다.

자신과 함께 수년간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 자신을 돌로 치려하자 다윗은 몹시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은 다윗은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에봇에는 흉패가 달려있고 그 안에 우림과 둠밈이라는 물건을 넣었는데 이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출 28:4-30). 다윗이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게 한 것은 바로 이 우림과 둠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전에도 우림과 둠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물은 적이 있습니다(삼상 23:9-12). 그런데 블레셋으로 갈 때는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임의대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다 큰 위기를 만났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큰 낭패를 볼 뻔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황상 아말렉을 추격하여 포로된 가족들을 구출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하나님께 묻기를 원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순탄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아멜렉 사람들의 위치를 알고 있는 이집트 사람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이 사람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다윗은 유목민이었던 아말렉 사람들을 따라잡는데 애를 먹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낙심한 백성들이 다윗에게 또다시 위협을 가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절망적인 상황이란 없습니다. 신실하시며 영원토록 한결같으신 하나님께서(히 13:8) 우리가 고난당할 때에 힘과 용기를 주시며 반드시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십니다(고전 10:3).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다윗처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신뢰할 때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고 그것을 자신과 함께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투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 일부가 이를 반대했습니다. 자신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릎 쓰고 도로 찾은 물건과 전리품을 함께 출전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라고 했습니다. 불량배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벨리알의 아들 혹은 사람이란 뜻으로, 쓸모없는 자, 아주 악한 사람, 어리석은 자 등을 가리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벨리알의 아들들이었고(삼상 2:12, 불량자), 다윗과 재혼한 아비가일의 남편이었던 나발 역시 벨리알의 아들로 불렸습니다(삼상 25:17, 불량한 사람).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전리품을 나눠줄 수 없다는 것은 악한자나 불량배들이 하는 짓입니다. 전방에서 싸운 사람이나 후방에 남아 소유물을 지킨 사람 모두에게 전리품을 분배하는 것이 옳습니다. 사실 후방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소유물을 지키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전장에 나가서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도로 찾은 물건과 전리품을 공평하게 분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공동체 의식을 갖자는 것입니다.

공동체란 ‘운명과 생활을 같이하는 몸’을 말합니다. 행 2장에 보면 ‘같이’(46)라는 말과 ‘함께’(47)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공동체 생활’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었습니다. 중남미에 서식하는 박쥐 중에 동물의 피를 먹고사는 흡혈박쥐가 있습니다. 이 박쥐는 매일 피를 먹지 못하면 죽기 때문에 피를 먹지 못한 박쥐가 있으면 다른 박쥐가 자신이 먹은 피를 토해서 배고픈 박쥐에게 나눠준다고 합니다.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먹이를 나누어 먹는 것, 동료를 어려움 속에서 구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흡혈박쥐가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 된 신령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물질로 도울 수도 있고, 위로의 말이나 기도로 함께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있는 다윗을 지켜 주셨던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며 환난 때에 언제나 돕는 분이십니다(시 46:1). 그러므로 다윗처럼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분을 신뢰할 때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서로 함께 그리고 같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기도하고 격려해주고 용기를 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