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리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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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2장 1절 ~ 7절 [개역개정]
1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2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 때에
3 또 자기와 함께 한 추종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다윗이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읍에 살게 하니라
4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5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들을 보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6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7 이제 너희는 손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지어다 너희 주 사울이 죽었고 또 유다 족속이 내게 기름을 부어 그들의 왕으로 삼았음이니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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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이 죽자 다윗은 왕위에 오릅니다. 하지만 반쪽짜리 왕이었습니다. 다윗의 동족인 유다지파만 그를 왕으로 인정했을 뿐 다른 지파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울의 넷째 아들인 이스보셋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섬겼습니다. 이스보셋의 본 이름은 ‘바알의 사람’이란 뜻의 에스바알입니다(대상 8:33). 다윗이 이스라엘 온 지파가 인정하는 왕이 되기까지는 7년 6개월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동안 다윗은 이스보셋과 전쟁을 벌여야만 했습니다. 이는 후에 이스라엘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두 왕국으로 분열될 것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다윗은 시글락에서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자신을 쫓던 사울이 죽었으니 더 이상 그곳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스스로 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평상시에도 다윗은 어떤 결정을 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뜻을 묻곤 했습니다. 하지만 종종 스스로 결정해서 행한 적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위험에 처하곤 했습니다. 이제 다윗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가장 확실하고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어디로 가야 할지 여쭙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림과 둠밈이었을 것입니다. 우림(אוּרִים)은 '빛'을 뜻하고 둠밈(תֻּמִּים)은 '완전'을 의미하는데, 이 두 단어는 히브리어 알파벳 첫 글자인 알렙(א)과 끝 글자인 타우(ת)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림과 둠밈이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마침처럼(계 1:8 ; 계 22:13) 하나님께서 처음과 나중이시요 모든 역사의 원인과 결과가 되신다는 신앙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사람은 온전하지도 완벽하지도 않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결정은 불완전합니다. 옳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늘 불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정 언제나 완전하며 어둠 속의 빛처럼 우리를 항상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잠언 기자는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했습니다(잠 3:5, 6). 우리가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묻는 다윗에게 ‘헤브론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헤브론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읍 가운데 하나로(민 13:22) 다윗의 동족 유다지파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 성읍은 도피성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습니다(수 21:3). 아브라함은 롯과 헤어진 후 이곳에 정착해 살았고, 이곳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 역시 이곳에 장사되었습니다(창 49:31 : 50:13). 지리적으로도 해발 900미터가 넘는 곳에 위치에 있어 천연의 요새였고, 주위에는 샘이 많고 비옥하여 과수재배에 적합했습니다. 헤브론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유다의 수도로 삼기에 손색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헤브론으로 가라고 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에 대해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왜 헤브론으로 가야 하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헤브론인지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결정이라는 사실입니다. 과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나아갔던 것처럼(히 11:8) 다윗 역시 믿음으로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헤브론으로 간 다윗은 그곳에서 유다 족속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습니다(2:4, 7). 비록 반쪽짜리 왕이었지만 하나님의 약속대로 왕으로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그리고 왕으로서 다윗이 처음 한 일은 공의를 베푼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 사울을 장사 지낸 사람들이 길르앗의 야베스 사람들이라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망을 했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매달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벧산까지 가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가지고 야베스로 돌아와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31:13 ; 대상 10:12).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이렇게 한 것은 과거 사울에게 받았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축복하면서 그들에게 선정을 베풀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상을 베풀고 악을 행한 자에게는 벌을 내리는 공의로운 통치였습니다.
공의는 나라를 다스리는 왕에 가장 필요한 덕목인데(잠 29:4 ; 미 3:1) 다윗은 모든 백성들에게 이 정의와 공의를 베푼 왕이었습니다(삼하 8:15). 또 공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삶이기도 합니다.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가운데 하나가 공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미 6:8).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지도자들을 향해 입을 열 때마 공의에 대해 언급했습니다(암 5:7). 이것은 이스라엘이 전혀 공의롭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주민들을 향하여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고 할 정도로 이스라엘이 타락해 있었습니다(렘 5:1).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망했는데(창 18:12) 이스라엘의 죄악은 그보다 더 심각했던 것입니다(겔 16:47).
잠언 기자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 즉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다(잠 21:3). 이스라엘 백성은 누가 통치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기도 하고 우상을 숭배하기도 했습니다. 다윗이나 히스기야, 요시야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왕이었을 때는 하나님을 섬겼지만(대하 31:21 : 34:32, 33) 르호보암이나 므낫세처럼 악한 왕이 다스릴 때는 우상을 섬기며 온갖 악을 행했습니다(왕상 14:22 ; 왕하 21:9).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책망을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책망을 받은 것은 모이는 것을 게을리했거나 제물을 드리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과 절기들에 열심히 모였고 많은 제물을 드렸습니다. 또 기도하지 않아서 책망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책망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뇌물과 선물 받기를 좋아하고 돈 없고 힘없는 고아나 과부의 송사는 받아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의와 공의를 멀리한 채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을 탐했습니다(사 1:23). 지도자들이 그러니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을 소돔의 관원들과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사 1:10). 소돔과 고모라는 악과 타락을 상징하는 도시이고 영원한 불로 심판을 받아 훗날 경건치 않은 사람들에 대한 본보기로 삼으신 도시이기도 합니다(벧후 2:6 ; 유 7).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이유를 ‘음란한 행실’ 때문이라고 했습니다(벧후 2:7, 8 ; 유 7). 음란한 행실이란 동성애를 비롯해 성적으로 문란한 행위를 말합니다(레 18:22, 23).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것은 동성애 때문만은 아닙니다. 에스겔서는 소돔의 죄악을 이렇게 언급합니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겔 16:49-50). 먹을 것이 많고 아무 걱정 없이 태평세월을 누리게 되자 마음이 교만하여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도와주지 않았고 거만하여 더러운 일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죄는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했습니다.
겔 16:47 말씀입니다. "네가 그들의 행위대로만 행하지 아니하며 그 가증한 대로만 행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적게 여겨서 네 모든 행위가 그보다 더욱 부패하였도다"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은 동성애뿐만이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동성애보다 더 가증히 여시 기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신 7:26 : 13:12-16 ; 롬 1:23, 25). 흠이 있는 제물 혹은 그것을 드리는 행위(신 17:1), 불공정한 거래(신 25:16 ; 미 6:10) 등도 모두 하나님께는 가증스러운 죄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동성애 때문이 아니라 이런 죄들 때문이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정의를 행하지 않았으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지 않았고 고아나 과부, 나그네 등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신 10:18).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불법을 행함으로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부패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동성애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때론 과격하게 반응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불법적으로 여기는 행동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영적인 예배라고 했습니다(롬 12:1).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하고 예배가 곧 삶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미가 선지자가 말하는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습니다(삼상 25:30). 그럼에도 유다지파를 제외한 다른 지파 사람들이 다윗 대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따른 데에는 아브넬의 영향이 컸습니다. 사울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브넬은 다윗이 하나님께서 사울 대신 택하신 왕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삼하 3:9, 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아브넬 역시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사울과 가까운 친족이었으므로(삼상 14:50 ; 대상 8:33) 그에 대한 의리 때문에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이스보셋을 이용하여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려고 한 것입니다(3:6). 지난 시간에 살펴본 아말렉 사람처럼 아브넬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꾀하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관계는 리스바 사건으로 인해 깨지고 맙니다. 사울에게 리스바라는 첩이 있었는데, 아브넬이 그 첩을 범하자 이스보셋이 그를 책망합니다. 그런데 뭐 뀐 놈이 성을 낸다고 아브넬은 오히려 화를 내며 다윗을 따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어차피 이스라엘은 다윗이 통치하게 될 것이니 이 기회에 다윗에게 붙어서 출세를 해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브넬은 눈앞의 이익만을 좇아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그런 아브넬이 기회를 잡기도 전에 죽임을 당함으로써 기회주의자의 말로가 어떤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넬이 기회주의자였다면 그를 죽인 요압은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감정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아브넬을 죽인 이유는 아브넬이 자신의 동생 아사헬을 죽였기 때문입니다(3:27). 더불어서 다윗의 군대장관이었던 요압은 아브넬로 인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를 죽였을 것입니다. 결국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것은 공적인 일이 아니라 사적인 감정과 이기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압의 감정적인 행동으로 인해 다윗은 또 한 번 위기를 겪을 뻔했습니다. 백성들로부터 다윗이 요압을 시켜 아브넬을 죽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3:37).
우리는 아브넬처럼 공의를 저버린 채 눈앞의 이익만을 좇는 기회주의자가 되지도 말고 요압처럼 공적인 일은 생각하지 않고 개인의 감정만을 앞세우는 감정주의자도 되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공의와 정의를 행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