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음TV/수요예배설교

마태복음 강해 :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2022. 7. 21.

 

성경본문 보기

마태복음 9장 14절 ~ 17절 [개역개정]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설교문 보기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종교인 기독교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로마 가톨릭(Roman Catholic)과 정교회(Orthodox Church), 그리고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 일컫는 개신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상 로마 가톨릭을 천주교라 하고, 개신교를 기독교라고 부릅니다. 원래 천주교와 정교회는 하나였는데, 1054년 서방교회인 로마 가톨릭과 동방교회인 정교회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가 어떤 방식으로 성호를 긋냐는 문제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이마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왼쪽에서 오른쪽에서 긋는데 정교회는 그 반대입니다. 성호를 긋는 방향이 분열의 한 원인이 될 정도로 중요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형식은 어느 면에선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식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예전의 형식을 진리인양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주는 교훈은 바로 이것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하루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파 사람들은 금식을 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모든 유대인들은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금식을 하도록 되어있습니다(레 16:29 ; 레 16:29-31 ; 23:26-32 ; 민 29:7). 그런데 포로기 이후에는 일 년에 네 차례 사월과 오월, 칠월과 시월에 금식을 했습니다(슥 8:19). 거기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습니다(눅 18:12). 요한의 제자들도 바리새인들처럼 이런 금식의 전통을 계속 지켜왔습니다. 특히 그들의 스승인 요한이 옥에 갇혀있었기 때문에(4:12) 그들은 지금 슬퍼하며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달리 예수님과 제자들은 요한이 옥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금식은커녕 전혀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고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요한의 제자였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말이죠(요 1:40).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그런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님께 이 문제를 가지고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비유를 통해 자신의 제자들이 왜 금식하지 않는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1. 혼인집 손님들의 비유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라는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란 신랑의 혼인 예식을 돕기 위해 온 친구들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치 신랑의 결혼 예식을 돕기 위해 온 친구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신랑은 예수님이고요. 성경은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 즉 교회를 신랑과 신부에 비유를 했습니다(마 25:1-12 ; 막 2:19, 20 ; 요 3:29 ; 고후 11:2 ; 엡 5:25-27). 유대사회에서 결혼잔치는 보통 일주일간 계속되었고 이 기간 동안 신랑의 친구들 뿐만 아니라 혼인 잔치에 초대된 손님들은 모두 기뻐하며 즐거워했습니다. 장례식에서 기뻐할 수 없듯이 결혼식에서는 슬퍼할 수는 없습니다. 이 기간 동안 신랑의 친구들에게는 몇 가지 종교적인 의무가 면제되었는데 금식도 그중의 하나였습니다. 따라서 신랑인 예수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은 슬퍼할 수도 슬퍼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는 지금이 슬퍼하고 금식할 때입니다. 그들의 스승이 감옥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신랑을 빼앗길 그런 날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그들도 금식을 해야 합니다(9:15). 하지만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닙니다. 금식은 기도와 구제와 함께 경건 생활의 핵심으로 지금도 유대사회에서 장려되고 있지만 그것이 형식적이고 위선적으로 흘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금식을 경계하신 것입니다(마 6:16).

2. 생베 조각의 비유

예수님께서는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라"고 하셨습니다. 생베는 '한 번도 세탁된 적이 없는 새 천'을 가리키는데 이것을 빨아서 말리면 줄어듭니다. 이와 같은 생베를 낡은 옷에다 대고 기우면 생베가 낡은 옷을 잡아당겨 더 찢어지기 때문에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는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종교의식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율법은 십계명(출 20:1-17)을 비롯해 여러 가지 규례들이 있었습니다(출 20:22-23:33 등). 이를 토라라고 하며 모세오경이 이에 해당합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이것을 모두 613개의 조항으로 세분화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생활에 적용토록 했습니다. 이외에 구전율법으로 알려진 미쉬나가 있었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장로들의 전통'이 바로 이것입니다(막 7:3). 예를 들면,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례는 율법에는 없지만 미쉬나에 는 있습니다(마 15:2). 유대사회에서는 율법뿐만 아니라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 것도 죄에 해당했습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율법학자들의 말을 거스르는 것은 성경 말씀을 거스르는 것보다 더 큰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랍비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는 것을 죽음에 해당하는 죄로 간주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옛 전통들 특히 금식과 같은 의식들은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즉 낡은 천에 비유된 유대인들의 종교의식이나 관습들은 새 천에 비유된 복음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비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고대에는 포도주를 가죽 부대에 넣어 저장하거나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새 포도주를 담을 때에는 반드시 새 부대를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을 경우 포도주가 발효하면서 생겨나는 가스의 압력으로 인해 부대가 터져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새 가죽 부대는 신축성이 높기 때문에 부대에 압력이 가해져도 손상이 없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성경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잘 지키고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하나님의 뜻은 외면한 채 그저 종교적 의식과 형식에만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형식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예전의 형식을 진리인양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형식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종교 개혁이후 교회에서는 예배 때 악기 사용을 금지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오르간을 사용했고, 그 후에 피아노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얼마나 많은 악기가 예배시간에 사용되고 있습니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타는 교회에서 아예 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타를 사탄의 도구라고 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기타는 교회에서 피아노와 더불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악기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예배 때에는 피아노만 사용하는 교단이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오르간이나 피아노도 처음부터 예배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악기는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악기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찬양할 때 쓰이는 악기 가운데 수금[하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악기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자신들의 공허함 혹은 쾌락(사 5:12)을 위해 만든 악기였습니다(창 4:21). 그럼에도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악기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일부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찬송가의 경우 예전에는 시편만을 찬송으로 부르도록 했는데, 그것도 단성부로만 불러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찬송가의 대부분이 다성부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 가운데는 일반 클래식 곡이나, 여러 나라의 민요 혹은 대중가요의 곡을 빌려온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찬송가 64장[기뻐하며 경배하세]는 베토벤의 합창곡 중 일부에 가사를 붙인 것이고, 493장[하늘 가는 밝은 길이]과 280장[천부여 의지 없어서]은 스코틀랜드 민요에 가사를 붙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런 곡에 가사를 붙인 찬송가를 부르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예배의 장소 문제로 고민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참된 예배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 성전을 세우고 거기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으며, 그들 나름의 경전과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예배를 예루살렘서만 드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요 4:20).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예배의 장소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드리는 장소가 예루살렘이 되었던, 그림 산이 되었던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드리는 자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전통이나 종교의식은 어느 면에서는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마음은 없고 종교의식에만 얽매어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리고 종교의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어야 하고, 또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대가 변했는데도 형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습니다. 물론 세상의 것들과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변하는 것은 문제지만 말입니다. 그것은 변화가 아니라 세상과의 동화입니다. 형식은 변해도 우리의 중심, 우리의 마음은 결코 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