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 안드레와 빌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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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장 1절 ~ 4절 [개역개정]
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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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는 같은 듯 다른 두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안드레와 빌립니다. 안드레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로 벳새다 출신의 어부였습니다(마 4:18). 빌립 역시 벳새다 출신이었는데 그의 직업이 어부였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먼저 안드레와 빌립의 어떤 점이 같은지 살펴보겠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형 베드로를 찾아가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하면서 그를 데리고 예수님께 갔습니다(요 1:42). 메시아란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의미입니다(요 1:41). 빌립도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란 메시아,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안드레와 빌립은 예수님을 만난 후 그분이 메시아, 그리스도이심을 믿었고 그의 형과 친구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빌립에게 되묻습니다. 당시 갈릴리는 사마리아만큼은 아니지만 유대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천대받는 지역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나사렛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시골 마을로 같은 갈릴리 사람인 나다나엘조차도 무시하는 그런 동네였습니다(요1:46). 더욱이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나사렛이 아닌 그의 고향,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요 7:42).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며 누구보다도 메시아의 오심을 갈망하던 나다나엘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습니다(요 1:48). 그런데 나사렛 사람 예수가 메시아라고 하니 나다나엘은 어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갈릴리의 나사렛이 아니었습니다. 나사렛은 예수님께서 어릴 때부터 살던 곳이고(마 2:23),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입니다(마 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를 때 '나사렛 예수'라고 했고, 빌립 역시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유대지역 사람들에게 천대받던 갈릴리에서 자라셨고, 또 그곳에서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돈 많고 권력이 있어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들, 하나님의 선민이라 으스대며 스스로 의인 인체 하는 사람들보다는 죄에 억눌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마 9:13 ; 막 2:17).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묻는 나다나엘에게 빌립은 "와서 보라"고 하면서 그를 권하여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난 후 빌립처럼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했고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안드레의 권유로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요 1:49).
또 빌립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한 헬라인 즉 유대교로 개종한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을 때 안드레와 함께 그들의 요청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요 12:20-22). 이처럼 안드레와 빌립은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전도자들이었습니다.
안드레와 빌립의 다른 점은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잘 나타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인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이적들 가운데 사복음서에 전부 기록된 유일한 사건입니다. 그만큼 이 사건은 제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안드레와 빌립의 고향인 벳새다로 가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여자와 어린이 외에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마 14:21 ; 막 6:44).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며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눅 9:10-). 저녁이 되어 날이 저물어 갈 때, 제자들은 무리를 보내어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기를 원했습니다(눅 9:12). 그곳은 빈들이라 많은 사람들을 먹일만한 음식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주변 마을들로 가서 각자 음식을 사 먹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마 14:15).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마 14:15, 16). 이 명령에 제자들은 몹시 당황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많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을까?' 제자들은 고민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요 6:5)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실 일을 미리 다 알고 계시면서도 빌립을 시험하고자 이렇게 물으신 것입니다(요 6:6). 이에 빌립은 "각자가 조금씩 먹는다 해도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으로도 부족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마 20:2)입니다. 이백 데나리온은 오늘날로 환산하면 천만 원이 넘는 큰돈입니다. 빌립은 무리에게 먹일 빵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계산했고, 이백 데라리온의 금액을 산출했습니다. 더구나 빌립은 벳새다(요 1:44) 출신이므로, 그 지방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빌립의 대답은 이 시간에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무리가 먹을 만큼의 양식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사람들로 하여금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각자 음식을 사 먹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같은 생각이었습니다(막 6:37).
이러한 빌립과 같은 사람을 가리켜 현실적이고 이해타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만나거나 또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이것저것 따져 계산해 보고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이해가 되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반면에 빌립과 같은 사람을 신중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매사에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실수가 적습니다. 반면에 신앙적으로는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물론 신앙에 있어서 신중함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참된 신앙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덮어놓고 믿는 맹신이 아니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없다고 해서 포기해 버리는 것 역시 올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문제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신앙입니다. 빌립과 제자들은 자신의 무능함만 생각했지 주님의 전능하심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이적들을 보았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각종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으며,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을 가리켜 '첫 번째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표적이란 어떤 일을 증명하기 위해 행해진 기적이나 이적을 말하는데,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표적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안드레와 빌립을 비롯해서 혼인 잔치에 참석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요 2:11). 그러면 빌립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하셨을 때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라는 부정적인 대답이 아니라 '주님이라면 하실 수 있습니다' 라는 긍정적인 대답을 했어야 했습니다.
사람은 빵 다섯 개와 두 마리의 물고기를 가지고 수천 명 혹은 수 만명의 사람을 먹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정만 육십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십 년 동안 먹이셨습니다(출 16:35). 백성들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을 때는 "그들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고 하면서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스무 날만 먹을 뿐 아니라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모세가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이 온데 주의 말씀이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라고 반문합니다. 빌립과 같은 부정적인 대답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은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는 것이었습니다(민 11:23).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눅 18:27).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도 하나님에게는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구원에 관해서 하신 말씀이기는 하지만 다른 문제에도 적용이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민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6:38). 그래서 제자들이 무리에게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빈손으로 왔는데, 안드레는 한 어린아이를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요 6:9)라고 말했습니다. 안드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으로 이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겠는가' 비관적인 생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예수님께 가지고 가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갖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런 희망이 없었다면 안드레는 오병이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무시해 버렸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희망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희망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시 39:1). 그래서 항상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더욱 찬양하겠다고 했습니다(시 71:14). 솔로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밝은 미래가 있고 희망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잠 23:18). 심지어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고 했습니다(잠 14:32). 바로 부활의 소망입니다(행 23:6 ; 24:15). 세상 사람들에게도 희망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그들이 갖는 희망은 모든 헛된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소망은 참된 소망이요, 산 소망이요(벧전 1:3), 좋은 소망이요(살후 2:16), 복된 소망이요(딛 2:13), 영원한 소망(고전 13:13 ; 딛 1:2)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헛된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딤전 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