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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궤, 여호와의 궤

예음TV/주일예배설교 2022. 7. 24.



성경본문 보기

사무엘하 6장 1절 ~ 10절 [개역개정]
1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2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3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6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설교문 보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고, 성막을 만들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성막은 예루살렘에 성전이 지어질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를 드렸던 이동식 성전이었습니다. 성막 안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고 지성소 안에는 아카시아의 일종인 싯딤나무에 순금을 입힌 궤가 있었습니다. 이 궤는 언약궤(민 10:33 ; 14:44 ; 신 31:9) 혹은 증거궤(26:33)라고도 불리는데, 궤 안에 '증거의 판'이자 '언약의 판'인 십계명의 두 돌판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출 25:16). 이 궤가 바로 본문에 언급된 하나님의 궤 혹은 여호와의 궤입니다.

그리고 이 궤를 덮는 뚜껑을 속죄소라 부릅니다(출 25:17). 속죄소란 '속죄의 장소'란 뜻으로, '덮다', '잊어버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속죄소는 '지은 죄를 덮어주고 잊어버리는 장소'를 말합니다. 이 속죄소는 다른 말로 '은혜의 보좌'(히 4:16)라는 뜻의 '시은좌(施恩座)'라고도 합니다. 속죄소 위에는 두 그룹의 형상이 양 끝에 하나씩 세워져 있는데, 그 날개를 높이 펴서 속죄소를 덮고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도록 했습니다(출 25:19, 20). 그룹(히, 케루브)을 천사의 일종으로 보기도 하고 천사와 다른 존재로 보기도 하는데, 사탄도 이 그룹이었습니다(겔 28:14). 그룹은 하나님의 보좌를 수호하는 존재로 속죄소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이며 은혜의 보좌임을 보여줍니다(겔 10:4 ; 28:16).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고 하셨습니다(출 25:22).

하나님의 궤가 있는 지성소는 히브어로 '코데쉬 하코다쉼'이라고 합니다. 직역하면 '거룩한 곳들 중의 거룩한 곳' 즉 '가장 거룩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지성소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을 들여다보는 것조차도 금지되었습니다. 이를 어길 경우 죽임을 면치 못했습니다(레 16:2).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하루 속죄일(레 23:27)에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히 9:7). 그만큼 하나님의 궤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지극히 거룩한 물건이었으며 소중히 다뤄야 했습니다(삼하 6:2). 오늘 본문은 이 궤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엘리가 제사장으로 있을 때 하나님의 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긴 적이 있었습니다. 수개월 후에 되돌려 받기는 했지만 기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긴 후 수십 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습니다(삼상 7:1, 2). 사람들은 언약궤가 방치되어 있음에도 별 관심이 없었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조차도 하나님의 언약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방치된 것에 마음 아파했던 다윗은(대상 17:1) 사울과 이스보셋이 죽고 통합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자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이전한 후 수십 년 간 방치해 두었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기기로 작정했습니다.

이를 위해 다윗은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삼만을 모으고 언약궤가 있는 기럇여아림으로 갔습니다(대상 13:6). 그중에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도 있었습니다(대상 13:2).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새로 만든 수레에 싣고 그동안 궤를 지키고 있던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효[아히오, 대상 13:7]로 하여금 수레를 몰도록 했습니다. 웃사와 아효를 손자로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궤를 실은 수레가 얼마쯤 갔을 때 소들이 날뛰자 하나님의 궤가 떨어질 것을 염려한 웃사가 손으로 법궤를 잡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웃사의 잘못함을 보시고 진노하셔서 치시니 그가 궤 곁에서 죽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수레를 끄는 소들이 날뛰므로 흔들리는 법궤를 잡으려고 했던 웃사의 행위는 전혀 잘못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 웃사를 죽이신 하나님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 엘리사는 자신을 조롱한 어린아이들을 저주해 사십이 명이 곰에 찢겨 죽기도 했습니다(왕하 2:13, 24). 사람 편에서 보면 너무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선지자를 조롱한 것은 매우 심각한 죄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그를 조롱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모욕한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대하 36:16). 비록 그들은 어린아이들이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웃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거룩하기 때문에(대하 8:11) 아무나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었습니다(민 4:15, 20). 제사장들이라도 궤를 만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레위지파 사람들조차도 궤를 직접 볼 수는 없었습니다. 궤는 고사하고 성소 안에 있는 어떤 물건도 봐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를 어기고 성물을 보거나 만지면 죽음이었습니다(민 4:20). 이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규례요 명령입니다. 그럼에도 이를 어기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하나님의 궤가 처음 돌아온 곳이 벧세메스였는데, 그곳 사람들이 궤 안을 들여다보다가 오만 칠십 명이 떼죽음을 당했습니다(삼상 6:19). 법궤 안에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이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겼는지, 그 외에 다른 것은 없는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마치 하와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것처럼 벧세메스 사람들은 호기심 때문에 해서는 안 될 큰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벧세메스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삼상 6:15). 이 사람들은 제사장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벧세메스는 아론의 자손들에게 주어진 성읍이기 때문입니다(수 21:13-15). 그럼에도 사람들이 법궤 안을 들여다봤을 때 왜 레위인들이 말리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 역시 법궤 안이 궁금해했을 것이고 오히려 그들이 주동이 되어 궤를 들여다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찌 됐든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궤 안을 들여다 봄으로써 큰 징계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궤를 잡은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화가 나서 그곳을 베레스 웃사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웃사의 죽음에는 다윗의 책임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방법대로 궤를 운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제사장 혹은 레위 자손 가운에 고핫 자손이 언약궤의 양 편에 달린 고리에 채를 꿰어 어깨에 메도록 되어 있었습니다(수 3:6 ; 민 4:15). 그러나 다윗은 이를 모르고 새 수레에 법궤를 실어 운반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를 다윗이 하나님께 묻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같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대상 13장에는 다윗이 하나님의 궤 옮기는 일을 군대 지휘관들과 의논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묻는 대신 사람들과 의논을 했다는 것이죠. 그것도 전문가인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이 아닌 군인들과 말입니다. 그때 새 수레에 법궤를 실어 옮기기로 의견을 모았던 것 같습니다. 궤를 옮겨야 한다는 마음만 앞섰지 어떻게 옮겨야 할지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묻고 신중하게 결정했더라면 웃사가 죽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사실 웃사의 죽음에는 제사장과 레위사람들의 책임이 더 큽니다. 비록 그들이 다윗과 의논하는 자리에는 없었더라도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현장에는 있었습니다(대상 13:2).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잘 알고 또 알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레 10:11 ; 신 17:11 ; 신 33:10). 그들은 분명 하나님의 궤를 어떻게 운반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잘못된 방법으로 궤를 운반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습니다. 직무유기입니다. 다윗을 비롯해 종교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하나님의 궤를 운반함에 있어서 너무 안일했습니다. 옮겨야 한다는 마음과 생각만 있을 뿐 어떻게 옮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한순간에 잔칫집 분위기에서 초상집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목적도 선해야 하지만 과정도 선해야 합니다. 목적이 옳다고 과정이 무시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웃사가 잘못함으로 진노하셨고 그를 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일로 화가 났습니다. 자기 딴에는 하나님께 대한 열심으로 이 일을 했는데 웃사가 죽는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니 마음이 언짢았던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궤를 자기가 있는 다윗 성으로 옮기지 않고 대신 오벧에돔의 집으로 가져갔습니다.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의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이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지자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진노가 풀렸다고 생각하고 다시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동안 다윗은 지난 사건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을 것이고 근본적인 원인이 궤를 운반하는 방법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대상 15:13). 다윗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및 이스라엘 각 지파의 장로들과 지휘관들을 모아 오벧에돔의 집으로 갔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수레가 아닌 레위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궤를 메게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길 수 있게 되어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래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뛰놀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다윗의 아내 미갈이 그의 행동을 업신여기며 왕으로서 품위를 잃은 행동을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미갈은 다윗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눈에는 다윗이 사람들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모습이 왕으로서의 품위와 체통을 무시한 행동으로만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수십 년간 방치되었던 여호와의 궤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지만 신앙이 없었던 미갈은 아무런 감동도 감격도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궤는 그의 아버지 사울처럼 관심 밖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행동을 비웃고 업신여기는 미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6:1) "하나님께서 사울과 그의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여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하나님 앞에서 춤추고 찬양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것은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것이 아닌가"라고 미갈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운반하는 방법은 일전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용했던 방법입니다. 그들은 빼앗은 궤를 돌려줄 때 새로 만든 수레에 궤를 싣고 두 마리의 암소로 하여금 그것을 끌게 했습니다. 다윗 역시 암소를 황소로 대체했을 뿐 같은 방법으로 궤를 운반하려고 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방법을 따라한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과 의논하면서 그런 방법을 도출해낸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찌 됐든 하나님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이 아닌 사람이 만들어낸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비신앙적인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야 할 일들과 해서는 안 될 일들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모세는 그 말씀을 전하면서 그대로 살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신 11:25-27).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마음대로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 멸시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신 32:15). 그런 자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자들이고(사 29:13),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들입니다(딛 1:16).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진정으로 섬기는 자들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또 그 말씀을 잊지 않도록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벧세메스 사람들처럼 망령되이 행하지 않고 웃사처럼 실수하지 않습니다. 또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신중하게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잠언 기자는 어떤 길은 사람의 눈에는 바른길 같이 보이지만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는 길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잠 14:12).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등불이 되고(시 119:105)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딤후 3:16). 그러기 위해서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삶과 신앙의 기로에서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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