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대신하여
성경본문 보기
사무엘하 18장 28절 ~ 33절 [개역개정]
28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아뢰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29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30 왕이 이르되 물러나 거기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서 있더라
31 구스 사람이 이르러 말하되 내 주 왕께 아뢸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하니
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설교문 보기
다윗 왕에 대한 반역은 주모자인 압살롬이 죽음으로 완전히 진압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사람들의 다양한 면면을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 다윗
다윗은 압살롬과의 전투에 앞서 군 지휘관들에게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해줄 것을 명령했습니다. 비록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죽이려고 했지만 다윗은 아버지로서 아들인 압살롬을 살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바람과 달리 압살롬이 죽자 다윗은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파서 성문 위의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울었습니다. 그는 올라가면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에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고 울부짖었습니다. 다윗은 아들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에 더욱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습니다.
율법에는 부모를 저주만 해도 죽이도록 되어있습니다(출 21:17 ; 레 20:9). 하물며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를 해하려 한 압살롬의 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런 아들을 오히려 살리려고 했으며 압살롬 대신 자신이 죽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고 부모의 심정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압살롬 못지않은 자들이었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고(골 1:21)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엡 2:3).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으시고 오히려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엡 2:3-5). 원수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를 대신 죽음의 자리에 내어주신 것입니다(롬 5:8).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며, 다윗은 이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합니다(마 5:46).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44).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마 5:45 ; 롬 12:20).
2. 인생의 무상함을 보여준 압살롬
이스라엘에는 사울이나 다윗, 아도니야(왕상 1:6)처럼 용모가 준수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지만 압살롬에 비할 바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외모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머리털은 해마다 자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무거웠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머리털은 힘과 아름다움을 상징했는데, 이러한 외모로 인해 압살롬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삼하 14:25, 26). 또 압살롬은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딸의 이름은 다말로 미모의 여인이었습니다(삼하 14:27). 세상적으로 볼 때 압살롬은 부족함이 전혀 없는 인생의 소유자였습니다. 하지만 그 인생은 비극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압살롬에게 있어서 최고의 자랑거리였던 머리털은 그의 죽음에 일조를 했습니다. 그가 전쟁에 패하고 노새를 타고 도망을 가다가 상수리나무 가지에 그의 머리가 걸리는 바람에 요압과 그의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삼하 18:9-15). 그리고 일전에 압살롬은 '왕의 골짜기'라는 곳에 한 비석을 세우고 자기 이름을 따서 '압살롬의 기념비'라고 지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자기 이름을 전할 즉 자신의 이름을 기념해 줄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삼하 18:18).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앞에서 압살롬에게 세 아들이 있었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입니다. 세 아들이 모두 단명한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압살롬의 세 아들은 모두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습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아버지 다윗보다 일찍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 그리 슬퍼했던 것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또 압살롬이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세운 비석은 그의 명예가 아니라 수치를 나타내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기념비를 볼 때마다 사람들은 압살롬의 반역과 그의 비극적인 최후를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세운 것이 오히려 반역한 자의 최후를 보여주는 지표석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압살롬의 삶을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배우게 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생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또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인생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잠 27:1). 우리나라에서 유행되고 있는 말 가운데 '엄친아'가 있습니다. '엄마 친구 아들'의 준말로 집안이나 외모, 학벌 등 여러 조건을 두루 갖춘 완벽한 남성을 뜻하는 은유입니다. 또 좋은 환경에 태어나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금수저라는 말도 있습니다. 압살롬이 딱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유의 사람을 좋아하며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물론 자신의 인생과 비교하며 시기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처럼 엄친아요 금수저로 태어났다고 해서 그것이 복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인생 회고록이라고 할 수 있는 전도서를 썼는데, 시작부터 인생의 무상함을 말합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그리고 이어서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라고 묻습니다(전 1:3). '해 아래서'란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의 수고는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4절에 나와 있는데,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땅은 영원히 있는데 사람은 한 세대만 살다 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안개(약 4:14)와 같이, 그림자(대상 29:15; 전 69:12)와 같이, 꽃(욥 14:2)과 풀(시 103:15)과 같이 잠깐 세상에 있다가 사라져 버립니다. 여기에 인생의 허무함이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인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지혜와 권력 그리고 부를 가지고 온갖 것들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런 모든 것들을 영원히 누리며 살 수 없다는 것과 그런 것들 자체가 영원한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습니다.
흙수저로 태어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미국의 배우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1926. 6. 1 ~ 1962. 8. 4)는 당대 최고의 배우로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을 살다가 36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사망원인은 수면제 과다복용이었는데 그가 평상시 우울증 증세를 보인 것으로 보아 자살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자로서 가질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졌습니다. 나는 젊고 아름답습니다. 나는 돈도 많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외롭지도 않습니다. 건강하고 부족한 것도 없으며 미래에 대한 걱정도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공허하고 불행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 뭔지 모르지만 그런 기분이 찾아오면 난 불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인생은 파장하여 문을 닫는 해수욕장과 같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인생은 이처럼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깐 세상에 있다가 사라져 버릴 덧없는 인생,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언제나 우리 곁에 계셔서 어렵고 힘들 때마다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시 46:1). 성경은 그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 말합니다(시 84:12).
3. 사탄의 모습을 보여준 스루야의 아들들
다윗에게는 아비가일과 스루야 두 자매가 있었는데, 스루야의 아들들은 요압과 아비새 그리고 아사헬 삼형제였습니다(대상 2:16). 이들은 모두 다윗의 신복으로 요압은 군사령관이었습니다(삼하 8:16). 다윗은 압살롬과의 전투에 앞서 군 지휘관들에게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해줄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 명령은 군 지휘관들 뿐만 아니라 전투에 참여하는 모든 군인들이 다 들었습니다(삼하 18:5). 그런데 요압이 이 명령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였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이 슬퍼한다는 소식이 백성들에게 전해지자 그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 되었습니다. 이에 요압이 다윗에게 슬픔에만 잠겨있지 말고 백성들에게 위로의 말로 격려해 줄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한 명도 남지 않고 떠나갈 것이고 그리하면 지금까지 왕이 당한 모든 환란보다 더 큰 환란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사실 반란을 진압했다는 경사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죽었다는 이유로 다윗이 계속 슬픔에 잠겨있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이는 요압의 충고대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무시하는 처사였습니다(삼하 19:16). 비록 아들을 잃은 슬픔이 크기는 하나 그건 개인적인 일이었고 다윗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 개인적인 일만을 생각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다윗에게 충고를 서슴지 않은 요압의 행동은 일면 옳은 것이었지만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요압이 다윗에게 충고를 할 때 왕의 아픈 심정을 전혀 헤아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요압이 왕의 명령을 어긴 것도 큰 문제입니다.
요압이 압살롬을 죽인 이유는 그를 살려 둘 경우 또 다른 재앙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 반역죄는 마땅히 사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왕의 명령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인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윗의 명령을 어기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삼하 18:12). 이에 반해 요압은 왕의 명령을 무시해버렸습니다. 그냥 자기 마음대로, 자기 판단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요압의 이러한 행동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 전에는 사울의 군 사령관이었던 아브넬을 죽였고 이후에는 아마사를 죽여 평화로운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렸습니다(왕상 2:5). 동생인 아비새 역시 동조를 했습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비록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지만 스루야의 아들들이 자신보다 더 강하니 이런 악을 저지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 죄악에 따라 갚아 주시기만 바랄 뿐이라고 했습니다(삼하 3:39).
아비새는 압살롬을 피해 도망치는 다윗을 시므이가 저주하자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또 압살롬의 반역이 진압된 후 시므이가 와서 다윗에게 자비를 구할 때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삼하 19:22). 이에 다윗이 시므이에게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너희가 오늘 나의 원수가 되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여기서 '원수'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사탄'으로 '대적자'란 의미입니다. 반역이 진압된 후 다윗은 이제 왕위를 회복하고 다시 나라가 태평 시대를 맞이하려고 하는데, 이와 같은 날에 시므이를 죽인다면 평화로운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는 것과 다름이 없었기에 다윗은 자비를 구하는 시므이를 용서한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아비새는 시므이에 대한 복수에만 혈안이 되어 계속 그를 참소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비도 용서도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이스라엘과 다윗 왕을 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했고 그를 행함에 있어서 잔혹하고 무자비했습니다. 또 평화로운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려 이스라엘을 분열시키려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모습입니다. 후에 요압은 다윗의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가 모반을 할 때 그의 편에 섰다가 솔로몬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왕상 2:3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자연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어려울 때나 늘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자신에게 행하실 것을 원했습니다. 비록 불미스러운 일로 징계를 받기도 했지만 다윗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늘 지켜주셨고 선한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오늘날까지 다윗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위대한 왕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믿음의 선진으로 본이 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인간 중심으로 살았던 압살롬과 요압은 다윗과 솔로몬을 대적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아사헬은 기브온 전쟁에서 아브넬을 뒤쫓다가 허무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윗이 기도한 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에 따라 갚아 주신 것입니다(삼하 3:39). 심은 대로 거둔 것이죠.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것이고 우리는 기쁨으로 그것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