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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마태복음 강해 :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2022. 10. 5.
성경본문 보기

마태복음 13장 53절 ~ 58절[개역개정]
53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
54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58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설교문 보기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나사렛에서 자라셨습니다(마 2:23 ; 눅 4:16). 그래서 나사렛은 예수님의 고향으로 여겨졌고 사람들도 그를 ‘나사렛 사람’이라 불렀습니다(마 2:23).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에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는데(마 4:13), 이곳에서 천국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떠나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 가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눅 4:16, 17).

회당의 예배는 보통 신앙고백인 쉐마의 낭송(신 6:4-9 ; 11:13-21 ; 민 15:37-41)으로 시작합니다. 이어서 찬송, 기도 그리고 성경낭독과 강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성경낭독은 먼저 모세오경인 토라를 읽었는데 보통 1년에 한 번씩 통독을 했다고 합니다. 이어서 예언서를 읽고 강론이 이어졌는데, 성경 읽기와 강론은 남자면 누구나 할 수 있었습니다(눅 4:16-30). 이렇게 매주 모여 성경을 읽지만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그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그대로 살면 복을 받고 심지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요 5:39). 그들이 매주 읽는 토라뿐만 아니라 예언서는 곳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예수님께서 읽으신 사 61장의 말씀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 19 ; 사 61:1, 2)

예수님께서는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하셨습니다”(눅 4:21).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예언이 실제로 이루어졌고 그 메시아가 바로 자신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예수님께서는 여러 말씀들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이를 들은 사람들은 그에 대해 칭찬하고 놀라워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마 13:54, 55 ; 막 6:2, 3 ; 눅 4:22).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를 다니시며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각종 병자들을 고치셨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마 4:23, 24). 그리고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그에게 지혜와 권능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마 13:57 ; 막 6:3). 예수님을 배척했다는 말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당시 나사렛은 작은 마을로 인구는 3~4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후 이집트에 잠시 내려가셨다가 이곳으로 오셔서 서른 살까지 사셨습니다(눅 3:23). 그래서 대부분의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렸을 때부터 봐왔고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 목수로 일하셨습니다. 목수였던 아버지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장남이었던 예수님이 그 일을 이어받아 가족을 부양하셨을 것입니다(막 6:3). 한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가래나 멍에 같은 농기구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당시 목수는 천한 직업이었고, 대개 갈릴리 사람들이 그러하듯 예수님은 율법에 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또 힐렐이나 샴마이처럼 유명한 스승의 문하에서 배우지도 않으셨습니다(요 7:15). 그럼에도 가르침에 있어서는 어느 선생[랍비]보다 탁월하셨습니다(마 7:28 ; 막 11:18 ; 눅 4:22 ; 요 7:46).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던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설마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 소문이 사실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느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배척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편견 때문이었는데,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닌 여전히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특히 마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사회에서 보통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로 언급하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비록 아버지가 생존하지 않은 때라도 그 자녀를 어머니의 아들로 부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로 부른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당시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어머니의 아들로 부르는 것은 사생아를 지칭하는 경멸적인 표현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아이를 임신했습니다. 물론 이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었습니다(마 1:18). 요셉도 주의 천사가 알려주기 전에는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마 1:19, 20).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사람들은 마리아가 부정을 저질러서 아이를 가졌다고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문은 나사렛에서 진실이 아닌 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진실이 아님에도 진실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예수가 어느 날 갑자기 메시아라고 나타나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그의 가르침이 놀랍기는 했지만 목수의 아들이요 사생아를 메시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가버나움과 다른 곳에서 행하셨던 일들을 나사렛에서도 행하시길 기대하고 있었습니다(눅 4:23). 이에 예수님께서는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마 13:57 ; 막 6:4 ; 눅 4:24). 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속담으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요 4:44).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사람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으시고 다만 소수의 병자를 고치셨습니다(막 6:5). 이렇듯 나사렛 사람들은 선입관 때문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기회를 거부했고 편견 때문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선입관과 편견 때문에 진리를 거부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편견은 비단 나사렛 사람들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편견이기도 했습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 같은 동네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고(요 1:46,) 바리새인들은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요 7:52). 유대인들에게 있어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예수는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으로 인식되었고(요 7:15),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행 4:13). 예수님의 출신이 유대인들에게는 신앙의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벧전 2:8 ; 사 8: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편견과 선입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이 신앙의 걸림돌이 될 수 있고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신앙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이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신앙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과거의 삶을 기준으로 현재의 삶을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과거에 대해 아는 것은 그 사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그것으로 그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지금의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고후 5:17).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예수의 피값으로 사신(고전 6:20) 소중한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