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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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3장 1절 ~ 9절 [개역개정]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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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새해 첫 주일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올 한 해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예음교회와 예음교회 모든 권속들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울러 새해에는 영혼이 잘 되고, 몸도 건강하고, 계획하는 모든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열매로 맺어지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
어떤 절기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이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눅 13:1). 본디오 빌라도는 우리가 매주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예수님을 고난 받게 한 사람의 대표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빌라도가 본의와 다르게 유대인들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의 처형을 허락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처형을 원했던 사람은 빌라도가 아니라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그들에게 선동된 백성들이었습니다. 반면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애를 쓴 사람이었기 때문에(요 19:2) 그런 주장도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또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단지 본디오 빌라도의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가 아니라 '본디오 빌라도의 치하에서'로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해도 잘 못 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당시 유대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예수님의 처형이 그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마 27:26 ; 요 19:10). 베드로 역시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예수를 대적했다'고 했습니다(행 4:27). 하지만 빌라도는 대표일 뿐 예수님을 고난 받게 한 사람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우리 모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으시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으셨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사 53:4,5). 예수님은 누구 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바로 나 때문에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본디오 빌라도의 만행을 예수님께 전해 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빌라도의 잔인함이나 그가 죽인 사람들의 불쌍함 보다는 그들이 왜 그런 죽임을 당해야만 했는가 그 이유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당하는 불행을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 눈먼 자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묻기도 했습니다(요 9:1, 2). 욥의 고난이 그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친구들처럼(욥 4:7 ; 8:20) 사람들은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한 갈릴리 사람들이 큰 죄를 지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나님께서 희생제물을 드리는 사람들,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도록 내버려 두시겠느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은 실로암에서 있었던 사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실로암은 히스기야 왕 때 만든 연못으로, 이곳을 지키기 위해 망대가 세워졌는데, 이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눅 13:4). 사람들은 이 사건 역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처럼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죄가 적거나 혹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즉 그들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은 남들보다 더 큰 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재난이나 사고가 죄의 결과일 수 있지만 모든 것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이 눈먼 자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9:3). 그러므로 어떤 재난이나 불행한 사건을 무조건 죄와 연관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대가는 죽음입니다(롬 6:23).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죽음 후에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히 9:27). 예수님께서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하셨는데(눅 13:3, 5), 여기서 '망하다'는 말은 '멸망하다', '죽다'는 뜻으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시사합니다.
그러면, 회개란 무엇일까요? 회개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그 죄에서 떠나는 것이며(겔 18:30), 세상으로 향했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신 30:9 ; 행 3:19). 그래서 회개를 회심(回心)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참된 회개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마 3:8 ; 눅 3:8).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 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습니다. 그중에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있었는데, 요한은 그들을 책망하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마 3:10 ; 눅 3:9) 그러자 사람들이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에 요한은 '옷이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또 세리들에게는 '부과된 것보다 더 거두지 말라'고 했고, 군인들에게는 '강제로 돈을 뜯어내거나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여에 만족하라'고 했습니다(눅 3:10-14). 진정한 회개에는 반드시 행동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한 비유를 통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열매를 얻을까 해서 가 보았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포도원지기에게 "내가 삼 년이나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으려고 왔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 나무를 찍어버리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포도원지기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나무로서(민 13:23 ; 신 8:8) 평화와 안정 그리고 번영을 상징했습니다(왕상 4:25 ; 사 36:16 ; 미 4:4 ; 슥 3:10). 반면에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다는 것은 곧 재앙을 의미했습니다(렘 8:13 ; 욜 1:12 ; 미 7:1).
포도나무도 그렇지만 무화과나무는 볼품이 없습니다. 또 건축이나 가구의 재료로도 적합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아름다운 꽃도, 향기도 없습니다. 이 나무에서 찾을 수 있는 건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바로 열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무화과나무는 이 열매까지도 없었습니다. 꽃도 향기도 없고, 재목으로도 쓸 수 없는 이 나무가 열매까지 맺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존재의 이유가 없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오히려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어 땅만 버릴 뿐만 아니라 다른 나무의 성장에도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그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찍어버림'은 단순한 징벌이 아니라 '영원한 파멸'을 뜻합니다. 그러자 포도원지기는 주인에게 한번 더 기회를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다시 한번 거름을 주고 잘 보살필 터이니 다음 열매 맺는 철이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것입니다.
사실 포도원지기 입장에서는 주인의 말대로 하는 것이 편합니다. 그만큼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신경 쓸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위해 더 신경을 썼고, 수고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런 수고와 희생이 없었다면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을 기회조차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면 언젠가는 찍혀 불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마 7:19). 실제로 열매를 맺지 못해 저주를 받은 무화과나무가 성경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가셨다가 성 밖으로 나와 하룻밤을 지내시고 이른 아침에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몹시 배가 고프셨는데, 마침 길가에 있는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을까 하여 그리로 가까이 가셨습니다. 하지만 잎사귀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하셨고, 그 나무는 곧 말라버리고 말았습니다(마 21:19). 그런데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었던 것은 아직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막 11:13). 무화과는 5~6월경에 익는 '이른 무화과'(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 사 28:4)와 8~9월 사이에 열리는 '여름 무화과'가 있습니다. 이른 무화과는 3월에 열매가 열리고, 4월에는 잎이 무성했으며, 5월이나 6월이 되면 열매가 충분히 익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때는 유월절을 앞둔 4월경이었기 때문에 무화과가 완전히 익지는 않았을지라도 어느 정도 먹을 수 있는 열매는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무화과나무는 잎만 무성했지 열매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단순히 먹을 것을 얻지 못해 그 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열매 없는 신앙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는 상징적인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 만들어진 목적과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존재 가치는 잎사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열매에 있습니다. 물론 잎사귀도 나름대로 쓸모가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무화과나무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잎사귀가 아니라 열매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도 열매였습니다(막 11:13).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예수님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마치 열매가 있는 것처럼 잎이 무성하여 사람들을 현혹시켰습니다. 겉모습만 화려했지 실속은 없었던 것입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 가치를 상실한 나무였기에 결국 저주를 받아 말라죽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잎만 무성한 겉모습이 아니라 삶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도의 탈을 쓴 옛사람에 불과합니다. 겉으로는 거룩하게 보이고 세상 사람들과는 무엇인가 다르게 보일지는 몰라도 결국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길가에 심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아닐까요? 열매가 없으면서 겉모습만 꾸미고 허세를 부리는 신앙은 아닐까요? 이제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이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은 신앙이라면 회개하고 돌이켜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금년에도 우리에게 열매 맺을 기회를 주시며 참고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기대에 부응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는 2023년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