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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마태복음 강해 :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2023. 1. 25.

 

성경본문 보기

마태복음 20장 29절 ~ 34절[개역개정]
29 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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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주된 사역 가운데 하나는 신체적인 질병이나 장애 혹은 귀신을 쫓아내는 치유사역이었습니다. 전체 복음서의 약 5분의 1 이 예수님의 치유 및 그로 인해 발생한 논쟁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 역시 그중의 하나로 예수님의 마지막 치유 사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상고해 보겠습니다.

1.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여리고에 바디매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으로 구걸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하루는 다른 시각장애인과 함께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누군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온갖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자신처럼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자신도 예수님을 만나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고, 그와 함께 있던 시각장애인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지금 자신의 앞을 지나고 계신 것입니다.

그 말은 들은 바디매오와 다른 시각장애인은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번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중 여러 번 이곳을 지나가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으로 이곳을 지나시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만일 바디매오가 이 기회를 놓쳤다면 죽을 때까지 시각장애인으로 구걸을 하며 평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기회는 머물러 있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기회가 찾아올 때에 잡지 않으면 그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또한 기회는 자주 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기회가 올 때 놓치지 말고 붙잡아야 합니다.

2. 장애를 극복해야 합니다.

바디매오와 함께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외치자 사람들은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들이 외치는 소리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랍비들은 보통 길을 걸어가면서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바디매오와 그 동료의 외치는 소리 때문에 말씀을 잘 들을 수 없게 되자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야단을 친 것입니다. 하지만 바디매오 일행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큰 소리로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시력이 회복되는 것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려고 할 때 그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일 수도 있고, 가족이나 친구일 수도 있고, 돈이나 명예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면 예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마귀는 계속 이런 것들로 우리를 방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이 필요합니다.

바디매오의 간절한 외침에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 마가에 의하면 이때 바디매오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막 10:50). 겉옷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으로서 뿐만 아니라 이불로도 사용이 되었습니다. 저녁에 추울 때 모포처럼 덮고 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는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고 했습니다(출 22:26). 거지에게 있어서 겉옷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비록 그의 겉옷은 보잘것없었지만 바디매오에게 있어서 그것은 없어서는 안 될 재산목록 1호였습니다. 그런데 왜 바디매오는 그처럼 중요한 겉옷을 내버렸을까요?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거지가 그렇듯 바디매오의 겉옷은 낡았을 것이고, 오랫동안 빨지 않아 냄새가 지독했을 것입니다. 그의 눈이 회복된다면 더 이상 그런 겉옷은 입지 않아도 되었고, 입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눈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겉옷을 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바디매오의 행동이 주는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과거의 삶, 옛 습관들을 벗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시기하고, 질투하고, 다투고, 속이고, 남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고, 남들을 비방하고, 거만하고, 뽐내고, 친절하지도 않고, 동정심도 없었지만(롬 1:29-31),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그런 삶을 내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4.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자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막 10:51 ; 눅 18:41). 이에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의 눈을 만지시자 그 즉시 보게 되었습니다. 바디매오가 언제 시각장애인이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는지 살다가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만일 볼 수 있다면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헬렌 켈러는 어렸을 때 앓은 열병의 후유증으로 시각과 청각, 언어장애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일곱 살 때 만난 가정교사 앤 설리번의 헌신으로 그녀는 장애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사회사업가가 되었습니다. 그가 지은 책 중에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 있는데, 그는 이 책에서 사흘간 자신이 보고 싶었던 것들을 다 본 후에 마지막으로 사흘간 눈을 뜨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와 또 한 사람은 눈을 뜨자마자 곧바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많았을 텐데 그들은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무엇을 얻으려고 따른 것도 아닙니다. 그저 눈을 뜨게 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남은 생을 예수님을 위해 살겠다는 마음으로 아무 조건 없이 따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무엇을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마땅한 삶입니다. 만일 우리가 물질적인 복이나 명예 등 세상적인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면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요 6:26). 그들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에 이끌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로 목적이 달성되지 않으면 아무 미련 없이 예수님을 떠날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혼합주의신앙에 빠지기 쉽고 잘못된 사상에 미혹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나 자신과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와 같은 사람들의 간절한 외침을 듣기 싫은 소음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이웃의 생존보다 자신의 불편함이 더 크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의 사정과 아픔을 헤아리고 위로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막말을 쏟아내 그들을 더 아프고 힘들게 합니다. 그것이 잘못인 줄 알면서도 불이익을 당할까 봐 침묵으로 동조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는 것인지 단지 교회만 나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나 창기와 같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외면치 않으셨고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결코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은 모두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마 12:50). 그런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의 간절한 외침을 외면치 않으신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어려운 이웃들에게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바디매오처럼 기회를 놓치지 말고 어떤 장애물도 믿음으로 잘 극복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