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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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8장 30절 ~ 40절[개역개정]
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이 야곱은 옛적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32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스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35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40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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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 가뭄이 3년째 계속되는 가운데 엘리야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아합을 만나러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그리고 왕궁 관리를 맡고 있는 오바댜를 통해 아합을 만납니다. 엘리야를 본 아합은 그에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엘리야는 그 책임이 아합에게 있다고 반박합니다. 아합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바알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예언자 400명을 갈멜산에 모이게 해서 이 가뭄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또 누가 참 하나님인지 가리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갈멜산은 지중해 해안에 인접한 산으로 높고 숲이 무성하여(아 7:5 ; 암 9:3 ; 미 7:14) 고대로부터 신성한 산으로 여겨졌고, 당시에는 바알 숭배가 성행하던 곳이었습니다. 한때는 여호와의 제단이 있었던 이곳에서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와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 간의 대결이 펼쳐지게 됩니다. 이 대결에서 엘리야가 승리하게 되는데, 그 과정은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신앙에는 중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와 바알의 예언자들 사이에 대결을 벌인다는 소식을 듣고 백성들이 갈멜산에 모였습니다. 엘리야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둘 사이'는 '두 의견 사이'라는 뜻이고, '머뭇머뭇하다'는 '절뚝거리다'는 의미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여로보암은 우상들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을 하나님 대신 섬기게 했습니다. 또 레위 자손만이 제사장직을 수행하도록 한 규정을 어기고 일반 백성을 제사장으로 삼았으며, 자기 마음대로 명절을 정하기도 했습니다(왕상 12:31-33). 그러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그리고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여호와 신앙을 지키려는 자들이 남유다로 내려왔습니다(대하 11:14, 16).
북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는 오바댜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도 있었지만(왕상 18:3, 4 ; 19:18) 대부분은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여호와를 섬기고 싶지만 아합 정부의 강요와 핍박으로 어쩔 수 없이 바알을 숭배하고 있는 자들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누가 참 하나님인지 확신을 갖지 못해 망설이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들에게 '두 의견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바알을 따르라'며 신앙의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확신도 용기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정복을 이끈 여호수아도 죽음을 앞두고 백성들에게 신앙의 결단을 촉구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이방 신들을 섬기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수 24:15). 이에 백성들이 결코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을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겠다고 다짐했지만 여호수아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수 24:19). 그들은 언제든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길 가능성이 다분했기 때문입니다(신 31:27). 그래서 여호수아는 백성들이 그 약속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증거의 비석을 세웠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죄악을 범했습니다(삿 2:11, 12).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사 그들이 여호와 신앙을 갖도록 촉구하셨지만(대하 36:15) 백성들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항상 머뭇거렸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두 의견 사이에서 절뚝거리지 말고 신앙의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신앙에는 중도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섬기지 않고 우상도 섬기지 않는다거나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긴다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양자택일만이 있을 뿐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 우리는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마 6:24).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신앙의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2. 여호와의 이름으로 무너진 단을 다시 쌓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누가 참 하나님인지를 가리는 기준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송아지 한 마리씩을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되 불은 붙이지 않고 각자 자기 신의 이름을 불러서 불로 응답하는 신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백성들은 그 말이 옳다고 대답했고, 바알의 선지자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알은 자연을 지배하는 신이자 태양과 불의 신으로도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먼저 바알의 예언자들이 송아지로 재물을 삼고 아침부터 정오까지 그들의 신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바알의 선지자들은 제단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면서 말합니다. "더 큰 소리로 불러 보라 바알은 신이니 묵상을 하고 있거나 잠깐 나갔거나 혹은 멀리 여행을 떠났거나 그것도 아니면 자고 있을지 모르니 깨워야 할 것이 아니냐". 엘리야가 언급한 일들은 신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묵상하거나 잠깐 나갔다고 혹은 여행을 하거나 잠을 잔다고 자신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지난번 사도신경을 강해할 때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네 가지인데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전능성, 전지성, 편재성, 불변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다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창 17:1).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막 10:27). 또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전지 하신 분이시며(행 1:24), 어디에나 계시는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시 139:8 ; 렘 23:24).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약 1:17).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가리켜 ‘신실하신 하나님’(신 7:9), '신실하신 여호와'(사 49:7)라고 말하는데, '신실하다'는 것은 '믿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신 그래서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알에게는 이러한 속성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엘리야가 바알을 신이라고 하면서 더 큰 소리로 불러 보라고 한 것은 말 그대로 조롱이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마치 엘리야의 말을 따르듯 더 큰 소리로 울부짖으면서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를 때까지 자해를 했습니다.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고대 우상 종교들이 흔하게 가졌던 풍습으로서 그러한 행위가 신을 감동시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수 백명의 사람들이 자기 몸을 자해하며 큰 소리로 미친 듯이 떠들어대는 모습은 광란의 도가니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기를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소리도 없고 어떤 응답이나 기척도 없었습니다.
이제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자신에게 가까이 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 곧 이스라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개의 돌을 가지고 바알 숭배자들에 의해 부서진 여호의 제단을 다시 고쳐 쌓았습니다. 이는 여호와 신앙을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되고 지파가 갈라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상으로 무너진 여호와 신앙을 다시금 회복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단을 쌓을 때 그냥 쌓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쌓았습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경배를 받으셔야 한다는 것과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할 때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쓰러뜨렸고(삼상 17:45),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이적을 행했습니다(눅 10:17 ; 행 3:6 ; 4:30 ; 16:18).
우리도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 대신 다른 이름이 들어가면 그게 곧 우상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예수의 이름만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3.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십니다.
엘리야는 단을 수축하고 그 주위에 두 세아의 곡식 종자를 담을 수 있는 도랑 즉 15리터 정도의 물을 부을 수 있는 도랑을 팠습니다. 그 다음 나무들을 벌려 놓고 그 위에 제물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물을 통 네 개에 가득 채워다가 제물과 나무들 위에 부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세 번을 해서 도합 12통의 물이 부어졌고 제단뿐만 아니라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이렇게 까지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고대에도 종교 사기극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단 밑에 빈 공간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불을 붙이고선 이를 신의 응답이라고 속이는 이교 제사장들이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엘리야가 이를 의식했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부각시키려 했다는 것입니다.
불과 물은 상극입니다. 제물과 나무가 물에 잠기다 시피하고 제단 주위 도랑까지 물이 가득 찬 상황에서 인위적으로 불을 붙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서만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는 오랜 시간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미친 듯이 떠들어 대던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와는 달리 짧고 간단했습니다. 그렇다고 간절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비록 짧고 간단한 기도였지만 그 속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브아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기도가 끝나자마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뿐만 아니라 돌과 흙도 태웠고 도랑의 물까지 모두 말려버렸습니다. 이를 본 백성들은 땅에 엎드리며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외쳤습니다.
세상에는 신이라 불리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실상은 우상에 불과합니다. 오직 여호와만이 유일하신 신이요 참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와 바알의 예언자들 간의 대결은 이 사실을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알의 선지자들은 기손 골짜기로 끌려가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을 미혹하여 우상을 섬기도록 한 자들의 결국이 어떤지를 보여줍니다(신 13:13-15). 그들에게 미혹된 사람 역시 같은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마 23:15). 그런 처사에 억울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모르고 그런 것이라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억울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분이지 누구도 억울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들이 거짓에게 미혹되는 것은 그들이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살후 2:11, 12). 자업자득입니다. 자기가 저지른 일의 결과를 자기가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많은 신들 가운데 한 분이 아닙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단지 선지자 중의 하나도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4대 성인 가운데 한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할 유일하신 분이십니다(요 14:6). 모든 신은 같다, 여호와와 바알은 같다는 말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만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엘리야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과 우상, 신앙과 세상 사이에서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정치나 외교에는 중도가 있지만 신앙에는 중도가 없습니다. 양자택일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든가 아니면 한편은 중하게 여기고 다른 편은 무시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6:24).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므로 우상의 제단을 쌓고 있지는 않은지, 신앙의 제단이 허물어져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머뭇머뭇하는 신앙, 절뚝거리는 신앙을 버리고 오직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