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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

2024.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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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13장 10절 ~ 14절 [개역개정]

10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
11 내가 모든 민장들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더니
12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13 내가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를 창고지기로 삼고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을 버금으로 삼았나니 이는 그들이 충직한 자로 인정됨이라 그 직분은 형제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느니라
14 내 하나님이여 이 일로 말미암아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내가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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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귀환한 그해 성벽 공사는 완성되었습니다. 공사를 개시한 지 52일 만이었습니다(느 6:15). 공사가 끝나면 바로 봉헌식을 거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스 6:16) 당시에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정비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예루살렘에 거주할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주민은 너무 적었고 반면에 예루살렘은 크고 넓었기 때문에 유사시를 대비해서 적정 인원이 거주해야만 했습니다. 이에 백성의 지도자들과 남은 백성 중에서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을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했습니다. 또 예루살렘에 살기를 원하는 자들도 있었는데, 백성들은 그들을 위해 복을 빌었습니다(느 11:2). 비록 성벽이 완공되었다고는 하나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언제든 대적들이 공격해 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거주하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과 여호와 신앙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성전 제도를 정비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이미 오래전에 재건되었으나 여러 사정으로 인해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의 가계를 조사해서 그들에게 각 직무에 따라 순서를 정해주었고, 그들이 성전에서 일하는 데 전념할 수 있도록 율법에 정한 예물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곧 소산의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 등을 거두어 성전 곳간에 쌓도록 한 것입니다(느 12:44). 이것들은 매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공급되었습니다. 이러한 개혁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성벽 봉헌식을 치른 후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개혁이 진행되었습니다. 이 개혁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삶과 그들의 신앙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 장애물은 오늘날 우리 성도의 삶을 그리고 신앙을 방해하는 장애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느헤미야는 이를 어떻게 개혁해 나갔는지 그 과정을 들여다봄으로써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이스라엘 가운데 섞인 무리를 분리시켰습니다.

13장 1절과 2절 말씀입니다. “그날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이 개혁의 특징은 모세의 책 곧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개혁은 새로운 제도의 도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신 23:3). ‘여호와의 총회’란 이스라엘 공동체(민 20:4) 즉 하나님 백성의 모임을 의미합니다(삿 20:2). 하나님의 백성만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참여할 수 있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런 자들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호의를 베풀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했고(민 22:1-24:25),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비방하며 괴롭혔습니다(습 2:8, 10).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다 백성 가운데는 사업이나 결혼 등을 통해 이방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그들의 관습을 따르는 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방인 중에는 모압과 암몬 자손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그들과의 통혼을 금하셨고(신 7:3), 특히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지도자들과 관리들이 앞장서서 이런 죄악을 저질렀고(스 9:2), 이스라엘의 신앙을 책임져야 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까지도 이 일에 동참했습니다(스 10:18). 이들은 에스라 때 아내 된 이방 여인과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결의했습니다(스 10:3). 그런데 에스라가 자리를 비운 사이(느 8:1) 또다시 그 같은 일이 재연되었고, 그 중심에 역시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도 그중의 하나였습니다(느 3:20). 그는 암몬 사람 도비야와 매우 가깝게 지냈는데(느 13:4), 엘리아십 뿐만 아니라 유다 백성 중에는 도비야와 동맹을 맺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느 6:18). 또 엘리아십의 손자는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기도 했습니다(느 13:28).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 이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성벽 건축을 방해하고 이스라엘을 비방했던 사람들입니다(느 2:19 ; 4:1, 7).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다는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엘리아십은 도비야를 위해 하나님의 전 뜰에 있는 방들 곧 하나님께 드려진 성물을 보관하는 방들을 헐고 큰 방을 만들어 그가 살도록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는 악한 일입니다(느 13:7).

오늘날에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당시 여호와의 총회는 오늘날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여호와의 총회가 하나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처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면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 중에는 도비야처럼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도비야라는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비야는 ‘여호와는 선하시다’는 뜻으로 유대식 이름(스 2:60)입니다. 그의 아들 역시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의 여호하난입니다(느 6:18). 왜 암몬 사람이 유대식 이름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여러 견해가 있는데, 한 가지 확실한 건 도비야나 그의 가문이 유대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도비야가 그 이름처럼 하나님을 섬겼던 것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그는 성벽 건축을 방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도비야는 자신이 여호와를 섬기는 자로 자처하면서 유대의 귀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고 대제사장 엘리아십과도 친하게 지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양의 옷을 입은 이리와 같은 존재입니다(마 7:15). 교회들은 그런 자들을 잘 분별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마치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듯(고후 11:14) 그들은 자신을 교묘하게 위장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런 자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간곡히 권면한 바 있습니다(고후 6:14).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 특히 다른 종교를 가진 자들과 섞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신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은 신앙의 유익은커녕 오히려 해가 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신자 혹은 불신자 가정과 결혼 관계를 맺거나 동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한 한 연구에 따르면 반드시 기독교인과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50%가 조금 넘었고,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은 20% 중반이었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거나 불신자와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https://www.newslook.co.kr/news/ articleView.html?idxno=10339). 불신자와 결혼한 사람 중에는 혼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중에는 다른 종교로 개종을 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그 비율은 미미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방인과 통혼하지 말라고 명하셨고, 바울은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경고한 것입니다(고후 6:14).

이스라엘 백성은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에 관한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들을 모두 분리했습니다(느 13:3). 그리고 느헤미야는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행한 악한 일을 알고는 너무나 화가 나서 그 방에 있는 도비야의 세간을 모두 밖으로 내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 방을 정결케 하고 다시 원래대로 복구시켰습니다(느 13:9). 그리고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던 엘리아십의 손자도 쫓아내었습니다(느 13:28). 이는 그가 이방 여인과 결혼함으로써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혔을 뿐 아니라 그 직분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느 13:29). 만일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처럼 작은 죄가 공동체 전체를 병들게 합니다(고전 5: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켜 성도라 부릅니다.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란 말에는 세상으로부터의 ‘분리’ 혹은 ‘구별’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레 20:24). 그래서 성도의 모임은 세상의 모임과는 달라야 하고, 성도의 삶은 세상 사람들과의 삶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는 세상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고 또 살아야 하지만 그들과 섞여서는 안 됩니다. 

2.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않도록 했습니다.

백성들은 해마다 소산의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 등을 바치므로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않겠다고 언약을 했습니다(느 10:35-39). 느헤미야는 그것들을 가져오게 해서 곳간에 쌓아 놓고(느 12:44) 레위 사람들에게 필요한 몫을 주었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그것들 가운데 십분의 일을 또 구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습니다(느 10:38). 이는 모두 율법이 정한 규례에 따른 것입니다(민 18:26-28). 그런데 느헤미야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느 13:6) 백성들은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않았습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백성들의 십일조가 유일한 수입원이었기에 십일조가 중단되자 생계를 위해 각각 자기 밭으로 떠났습니다. 이로써 성전의 기능은 제대로 수행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전은 버려진 바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느헤미야는 민장 곧 관리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들은 백성의 지도자들로서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책임은 대제사장인 엘리아십에게도 있습니다. 그는 성전의 일을 총괄하는 대제사장으로서 레위 사람들이 보수를 받지 못해 자기 밭으로 떠나도록 방치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레위 사람들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였고, 느헤미야는 이를 관리할 사람들을 세워 레위 사람들에게 분배하도록 했습니다. 이로써 제대로 수행되지 못했던 성전의 기능이 다시금 회복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을 비롯한 레위 지파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했습니다. 즉 레위 지파 사람들이 직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백성들이 첫 소산과 십일조 등을 드려야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전은 레위 지파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각자에게 주어진 의무를 감당할 때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어느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몸과 같습니다. 우리의 몸은 많은 지체로 이루어져 있고, 그 지체가 각자의 기능을 잘 수행할 때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지체라도 잘못되면 그로 인해 몸 전체가 고통을 당합니다. 반면에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고전 12:26).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그와 같습니다(고전 12:12).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체인 성도들은 교회가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각자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나뉨이 없게 하시고 몸의 여러 지체들이 서로 돌보며 살게 하신 것처럼(고전 12:25), 성도는 자기 자신의 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빌 2:4). 그럴 때 교회는 하나가 되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음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