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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2024. 7. 4.
성경본문 보기

사도행전 1장 15절 ~ 26절 [개역개정]

15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설교문 보기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들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돌아와 그들이 묵고 있는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으로 올라갔습니다. 이 다락방은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 다락방으로 추정이 되는데(행 12:12), 마가라 하는 요한은 마가복음의 저자입니다. 그곳에는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의 동생들 곧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있었습니다(마 13:55; 막 6:3). 그들은 처음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나(요 7:5),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회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중의 야고보는 베드로와 더불어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어가는 기둥과 같은 지도자가 되었습니다(갈 2:9). 이들과 함께 다락방에 모인 무리는 열한 사도를 포함해 모두 백이십 명쯤 되었습니다(행 1:15).

원래 사도는 열두 명이었습니다(마 10:2). 그런데 한 명 곧 가룟 유다가 불미스러운 일로 제외되었습니다. 그는 탐욕에 눈이 멀어 스승인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겼습니다(마 26:15). 후에 예수님께서 정죄당하시는 것을 보고 뉘우쳐 돈을 돌려주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마 27:5). 본문에는 그가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행 1:18). 아마도 목을 매었던 나뭇가지가 부러지거나 줄이 끊어져 몸이 땅이나 바위로 떨어졌던 것 같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유다로부터 돌려받은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는데(마 27:7), 이는 가룟 유다가 불의의 삯 곧 예수님을 판 돈으로 그 밭을 산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 밭을 ‘아겔다마’라 불렀는데 이는 ‘피 밭’(마 27:8)이라는 뜻의 아람어입니다(행 1:19).

이에 대해 베드로는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라고 했습니다(행 1:16). 이는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라는 시편의 말씀입니다(시 69:25). 이어서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세우자고 제안했는데, 그 근거로 다시 시편을 인용했습니다.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시 109:8) 그리고 사도의 자격으로 다음과 같은 요건을 제시했습니다. 즉 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부터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예수님과 함께 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즉 사도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직접 그의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사도가 이런 자격을 갖추어야만 하는 이유는 사도라는 직분이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언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행 1:22).

당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그의 제자들이 조작한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있었습니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가놓고선 마치 예수님이 부활한 것인 양 지어냈다는 것입니다(마 28:13-15). 물론 이것은 대제사장들이 꾸민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 있었고, 이것을 대제사장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숨기기 위해 오히려 제자들이 그것을 조작했다고 소문을 퍼뜨렸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한다는 것은 박해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일을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의 자격을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직접 그의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사람으로 한정했던 것입니다.

그런 자격을 갖춘 두 명의 제자가 추천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었고, 다른 한 명은 맛디아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사도의 직분에 적합한 사람들이지만 그 가운데 한 명만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행 1:24-25) '뭇사람(곧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라는 말속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선택 기준은 사람과 다릅니다. 사람은 외모 즉 겉모습을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중심 곧 마음을 보십니다(삼상 16:7). 사람이 보는 관점은 겉으로 드러난 외모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부유하고 권력이 있는 가문 출신에 잘생긴 외모를 가진 청년이었습니다. 보통 잘생긴 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그보다 더 잘생긴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뛰어난 외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키도 보통 사람들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컸습니다(삼상 9:2).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 사울은 왕으로서 아주 적합한 인물이었으며(삼상 10:24), 백성들로부터 인기 있는 왕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으로부터는 인정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았습니다(삼상 15:24).

사무엘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사울을 대신할 왕을 세우려고 이새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는 이새의 장남 엘리압을 보고는 그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외모와 키가 남달랐기 때문입니다(삼상 16:6).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조차도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했으니 일반 사람들이야 오죽했겠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중심 곧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의 기준에 엘리압은 미달이었습니다. 둘째인 아비나답을 비롯해 일곱째 아들까지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새의 여덟 아들 중 유일하게 막내인 다윗이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삼상 13:14 ; 16:12 ; 행 13:22). 다윗은 외모도 준수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이었습니다(삼상 17:37).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하나님이 택하신 민족 곧 하나님의 성민(선민)이었습니다(신 7:6, 7). 그런 민족의 왕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외모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앙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한 신앙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의 외모나 출신 가문, 학력 등은 세상일을 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유익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 자체로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두 번째 사사인 에훗은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왼손잡이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삿 3:15). 왼손잡이로 번역된 부분을 원어로 직역하면 ‘오른손이 불구인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에훗이 정말 오른손이 불구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베냐민 지파 사람들 가운데는 왼손잡이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삿 20:16). 그리고 그들 중에는 오른손도 잘 쓰는 양손잡이도 있었습니다(대상 12:2). 어쨌든 에훗은 왼손잡이였고 당시의 상황에선 어느 정도 편견을 감수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요즘은 인식이 많이 달라지고 있기는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왼손잡이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비정상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흔히 오른손을 '바른손'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입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전 인류의 약 85~90%가 오른손잡이라고 합니다. 이에 따라 도구 사용법이나 문화적 양식 등이 대부분 오른손잡이의 편의에 맞게 고안되었습니다. 특히 에훗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왼손잡이 에훗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에훗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고 이스라엘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한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의 외모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외모가 아닌 그 사람의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리석고 약한 사람들, 사람들로부터 멸시받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택하사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과 강한 사람들, 세상이 대단한 인물로 여기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고전 1:27-28). 아무리 외모가 뛰어나고, 배운 것이 많아도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비록 그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께 귀히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십니다.

‘감찰하다’는 말은 ‘살피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고(시 7:9 ; 롬 8:27) 그 마음의 비밀까지도 아시는 분이십니다(시 44:21). 비록 사람들이 보기에는 요셉과 맛디아 모두 사도의 직분에 적합한 사람들이었지만 사람의 마음과 생각까지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중에서도 누가 더 적합한 인물인지 아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주시길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비를 뽑았습니다. 이 방법은 당시 유대인의 전통으로 어떤 일을 결정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비 뽑기에는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이 전혀 개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제비 뽑기는 기도와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그 결과에 대해 불만이 있을 수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됩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로 뽑힌 사람은 맛디아였고, 그는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의 수에 들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무슨 일을 하거나 결정하기에 앞서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의 판단은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임의대로 결정했다가 낭패를 본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종 언급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신접한 자에게 물었으며(대상 10:13, 14)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다가(삼상 15:24) 결국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삼상 15:23 ; 삼하 6:21).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일을 진행했다가 큰 낭패를 보기도 했습니다(수 9:14). 다윗은 어떻습니까? 그는 중대한 일을 앞두고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고 움직였습니다(삼하 2:1 ; 5:19 ; 대하 14:14).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으로 하여금 어디를 가든지 이기도록 하셨고, 무엇을 하든지 형통케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도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임의대로 행동했다가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삼상 21:10-15 ; 29:1-11).

잠언서 기자는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라”고 했습니다(잠 14:12). 죽음에 이르는 길을 바른길로 착각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람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고, 미래의 일은 더더욱 알 수 없습니다(약 4:14).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또 어떤 결정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우리의 도움과 소망으로 삼아야 합니다(시 146:5).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