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보는 자에게 사랑을 받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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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2장 12절 ~ 18절 [개역개정]
12 처녀마다 차례대로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기 전에 여자에 대하여 정한 규례대로 열두 달 동안을 행하되 여섯 달은 몰약 기름을 쓰고 여섯 달은 향품과 여자에게 쓰는 다른 물품을 써서 몸을 정결하게 하는 기한을 마치며
13 처녀가 왕에게 나아갈 때에는 그가 구하는 것을 다 주어 후궁에서 왕궁으로 가지고 가게 하고
14 저녁이면 갔다가 아침에는 둘째 후궁으로 돌아와서 비빈을 주관하는 내시 사아스가스의 수하에 속하고 왕이 그를 기뻐하여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면 다시 왕에게 나아가지 못하더라
15 모르드개의 삼촌 아비하일의 딸 곧 모르드개가 자기의 딸 같이 양육하는 에스더가 차례대로 왕에게 나아갈 때에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가 정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보는 자에게 사랑을 받더라
16 아하수에로 왕의 제칠년 시월 곧 데벳월에 에스더가 왕궁에 인도되어 들어가서 왕 앞에 나가니
17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므로 그가 모든 처녀보다 왕 앞에 더 은총을 얻은지라 왕이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로 삼은 후에
18 왕이 크게 잔치를 베푸니 이는 에스더를 위한 잔치라 모든 지방관과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또 각 지방의 세금을 면제하고 왕의 이름으로 큰 상을 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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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39권 중에 책명이 여자 이름으로 된 것은 룻기와 에스더 둘 뿐입니다. 에스더는 이스라엘의 포로기를 배경으로 하며, 유대인의 명절인 부림절의 기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에스더가 왕후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섭리하시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기까지 세 차례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바사의 고레스(Cyrus II) 왕 때부터 아닥사스다(Artaxerxes I) 왕 때까지 세 차례에 걸쳐 유다로 귀환합니다. 그 중간에 바사를 통치했던 왕이 바로 본서에 등장하는 아하수에로(Ahasuerus)입니다(에 1:1). 그는 아닥사스다의 아버지이며, 에스라 4장(5)에 나오는 바사 왕 다리오(Darius I)의 아들입니다. 다리오는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도운 인물입니다(스 6:15).
기원전 486년 왕위에 오른 아하수에로는 아버지 다리오가 실패한 그리스 정복을 위해 3년 동안 준비했습니다. 그는 출정을 앞두고 각 지방의 총독과 군지휘관 등을 불러 6개월 동안 연회를 벌였습니다(에 1:4). 그리고 이 기간이 끝난 뒤에, 왕은 도성인 수산에 있는 백성을 모두 왕궁의 정원으로 불러들여서 일주일 동안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왕후 와스디도 아하수에로 왕궁에서 여자들을 위한 잔치를 베풀고 있었습니다(에 1:8). 잔치 마지막 날 술에 취해 기분이 좋아진 왕은 자기 곁에서 시중드는 일곱 내시에게 왕후 와스디가 관을 쓰고 왕 앞으로 나오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왕후가 미인이므로, 백성과 대신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틀어졌습니다. 와스디가 왕의 명령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이유로 그리했는지는 몰라도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왕의 말이 곧 법(전 8:4)인 시대에 그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일입니다. 이 일로 왕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마치 마음속에 불이 붙는 듯했습니다(에 1:12). 우리말에 ‘속에서 천불이 난다’ 혹은 ‘열불이 난다’는 표현이 있는데, 아하수에로가 딱 그 상태였습니다. 이에 왕은 박사들에게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물었고, 그들의 조언에 따라 왕후 와스디를 다시는 왕 앞에 오지 못하게 하는 조서를 내렸습니다. 한 마디로 폐위를 시킨 것입니다.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더를 왕후로 세우시고 그로 하여금 유대인을 구원하시려는 섭리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아하수에로 왕은 그리스 원정길에 오릅니다(B.C. 480). 그가 이끈 바사 군은 테르모필레 전투(영화 300의 배경)에서 승리한 후 아테네로 진격하지만 살라미스 해전(영화 300 : 제국의 부활 배경)에서 크게 패하고 본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니엘서에 언급되어 있습니다(단 12장). 그 후에 아하수에로는 와스디와 그녀가 행했던 일과 그것에 대해 내린 조서에 대해 생각했습니다(에 2:1). 와스디가 그리워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녀를 다시 불러올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 왕을 섬기는 신하들이 왕후를 뽑자는 제안을 했고 왕은 그 제안을 좋게 여겨 그대로 수행했습니다(에 2:4).
왕이 내린 명령과 조서가 반포되자 각 도에서 뽑힌 처녀들이 수산 궁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중에는 에스더도 있었습니다. 에스더는 ‘별’을 뜻하는 바사식 이름으로, 본명은 ‘화석류’ 혹은 ‘도금양(은매화)’이란 뜻을 가진 하닷사입니다(에 2:7). 에스더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살고 있던 아비하일의 딸(에 2:15)로 일찍 부모를 여의고 사촌인 모르드개에 의해 딸처럼 양육되었습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양녀로 삼은 것입니다. 아마 둘의 나이 차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에 2:7).
에스더를 비롯한 처녀들은 궁녀를 주관하는 헤개에게 맡겨져 관리되었습니다. 그런데 헤개는 에스더를 다른 처녀들보다 좋게 보고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습니다(에 2:9). ‘헤개가 에스더를 좋게 보았다’는 것은 ‘에스더가 헤개를 기쁘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이 그를 기쁘게 했던 것일까요? 외모가 아름다웠기 때문일까요(에 2:7)? 왕후의 조건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외모였습니다(에 2:4). 그 조건에 부합하는 처녀들만이 인도에서부터 구스에 이르기까지 백이십칠 지방에서 모였습니다(에 1:1). 외모만 볼 때 에스더 못지않은 처녀들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헤개를 기쁘게 한 것일까요? 그것은 에스더가 내적인 아름다움 곧 좋은 품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뛰어난 용모를 지녔다고 할지라도 성품이 좋지 못하면 사람들에게 호감을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좋은 품성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우리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으로서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가지고 계시지만 잘못을 범했을 때는 징계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세상 모든 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만하지 않고 늘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히 행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기뻐하고 좋아합니다. 에스더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뿐 아니라 그를 보는 자마다 호감을 느낄 정도로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에 2:15).
잠언 기자는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잠 31:30). 또 베드로는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라”고 말합니다(벧전 3:3-4). ‘마음에 숨은 사람’이란 '겉 사람'의 반대인 '속사람'을 말합니다(고후 4:16). 여자가 단장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지나치게 단장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의 아름다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하고 정숙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정말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없어지지도 않으며, 하나님께서도 귀하게 보십니다.
다른 처녀들보다 에스더를 좋게 본 헤개는 그녀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에스더에게 몸을 정결하게 하는 물품 곧 몸을 단장하는 미용품들과 일용품들을 신속히 주었으며, 왕궁에서 뽑힌 일곱 명의 시녀를 주고 그들과 함께 에스더를 후궁 아름다운 처소 즉 후궁에서 가장 좋은 장소로 옮겨 주었습니다. 헤개는 아마도 에스더가 왕비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판단했거나 아니면 그녀가 왕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곧 자신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자기의 민족과 혈통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모르드개가 말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에 2:10, 20). 유대 민족은 다른 민족과 달리 여호와 하나님만을 유일신으로 섬겼습니다. 생활방식도 다른 사람들과 달랐을 것입니다. 그런 유대인을 이방인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선과 같습니다. 더욱이 에스더는 포로의 신분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에스더가 왕비가 되는 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자기의 민족과 혈통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녀가 유대인이라는 내색을 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후에 그녀는 자신이 유대인임을 밝혔습니다(에 8:3).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밝혀야 할 상황에서는 추호의 망설임이 없어야 하지만 밝히지 않은 것이 도움이 된다면 굳이 밝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여러분에게 예수를 믿느냐 혹은 교회를 다니느냐고 묻는다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해야 하고 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러지 않겠습니까? 설사 자신에게 불이익이 온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 에스더처럼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것이 유익이 된다면 굳이, 누가 묻지 않았는데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이 아닌 삶을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면 되는 것입니다.
때가 되어 처녀들은 차례대로 아하수에로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 제7년 10월(태양력 12월~1월)에 왕궁으로 인도되어 왕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왕은 다른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였고, 그래서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로 삼았습니다(에 2:17). 그 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모르드개가 왕궁 문에 앉아있을 때 문을 지키던 왕의 내시 두 사람이 원한을 품고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왕궁 문에 앉았다는 것은 모르드개가 관직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가 맡은 직책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두 내시가 음모를 꾸민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모르드개는 이 사실을 에스더에게 알렸고,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 전해 주었습니다. 이에 왕은 일의 진상을 조사하여 그 보고가 사실임을 알고 그 두 사람을 나무에 매달아 처형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왕이 보는 앞에서 궁중 실록에 기록되었습니다(에 2:23). 이 사건은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당시 모르드개는 이 일로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물론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닙니다. 그것이 자신이 맡은 일이었고, 그 일에 충실했던 것뿐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후에 유다 백성을 구원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이 70년 만에 고국으로 귀환하게 되었을 때 이에 동참하지 않고 남아 있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비록 타국에서 포로의 신분으로 살고 있지만 그곳에 정착하여 나름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곳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남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는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남겨 놓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기스의 후손들 곧 모르드개와 에스더입니다(에 2:5).
항상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롬 8:28). 우리의 지나온 삶 그리고 앞으로 삶 속에서 우리가 실망이라고 생각했던 것 혹은 실패라고 여겼던 것조차도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 있든지 당황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용기를 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