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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2024. 7. 25.
성경본문 보기

[개역개정]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설교문 보기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제자들은 권능을 받았고, 그들을 통해 많은 이적과 표적들이 나타났습니다(행 2:3). 본문은 그중의 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루는 아홉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즉 세 시(오전 9시, 행 2:15)와 여섯 시(정오, 행 10:9) 그리고 아홉 시(오후 3시)에 기도했습니다. 특히 아홉 시 기도 시간에는 공중 기도를 드리는 순서가 있어서 많은 사람이 성전에 모였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의무가 아니고 종교적인 관습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 시간에 성전에 올라간 것은 단순히 기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모였으므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아무튼 베드로와 요한이 아홉 시 기도 시간에 맞춰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메고 와서 미문(美門) 곧 아름다운 문이라 불리는 성전 문에 두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할 수 있도록 그를 매일 그곳에 데려다 놓은 것입니다. 이 미문의 위치가 어디였는지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당시 성전에 출입할 수 있는 문은 모두 여덟 개였다고 하는데, 이 중에서 어느 문이 미문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미문이 어디냐가 아니라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미문에 앉아 있던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구걸을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그 사람을 주목하며 “우리를 보라”고 했습니다. ‘주목하다’는 말은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살피다’(행 1:10)는 뜻으로,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주목한 것은 단순히 불쌍히 여겨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그를 치료하라는 감동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 언제부터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나이가 사십이 넘은 것으로 보아(행 4:22) 꽤 오래전부터 그런 일을 해왔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행 3:2). 그렇다면 매일 성전에 모였던 제자들(눅 24:53 ; 행 2:46)이 그를 처음 본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베드로와 요한 역시 그를 보았을 것이고, 어쩌면 그에게 적선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는 왜 그에게 주목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마 성령의 감동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권능을 받았다 해도 그것을 임의대로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성령께서 허락하실 때 즉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만 행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18) 마가복음 16장을 강해할 때 말씀을 드렸는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뱀같이 독을 가진 동물을 만지거나 박해하는 자들에 의하여 강제로 독을 마시게 될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로마로 가던 중 배가 파선되어 머물게 되었던 멜리데 섬에서 독사에게 물렸으나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행 28:1-6). 그리고 전승에 따르면 사도 요한은 로마 황제 앞에서 독을 마셨으나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아무 때나 뱀을 만지거나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자들이 미국 동부 애팔래치아 산맥 일대에서 활동했었고(애팔래치아 이단들), 근래에도 있습니다. 이들은 예배 때에 뱀(독사)을 다루는 의식을 행합니다. 그러다 몇몇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이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중에 바울처럼 독사에 물리거나 요한처럼 독을 마시게 되는 경우 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무 때나 뱀을 만지거나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를 보라’고 하자 그는 무엇인가 얻을 것을 기대하면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이내 실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베드로의 첫마디가 "은과 금은 내게 없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베드로의 말은 그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습니다.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가장 큰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열에 아홉은 ‘걷는 것’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그런데 지금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향해 ‘일어나 걸으라’고 하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순간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그 사람의 오른손을 붙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즉시 그의 다리와 발목에 힘이 생겨 벌떡 일어나 걷기고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동안 꿈꿔왔던 그러나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일이 벌어졌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아마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드릴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는 매일 성전 미문에 앉아 있었으나 그 문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은 없습니다. 장애인은 이방인의 뜰에만 들어갈 수 있었고(마 21:14) 그것도 하반신을 전혀 쓸 수 없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성전은 예배드리는 장소 혹은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단지 연명을 위해 구걸하는 장소에 불과했습니다. 성전 미문이 아름답다고 한들 그 앞에서 구걸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자유롭게 성전에 출입하며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된 그의 눈에 비로소 미문은 아름다운 문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이 문으로 성전을 출입할 때마다 과거 자기의 모습을 회상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렸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당을 출입할 때마다 나를 위해 자기 몸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않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시 50:23).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이 고침을 받고 제자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자 그를 본 사람들은 몹시 놀랐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이 성전 안에서 걷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행 3:10). 그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고 있는 것을 본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곳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행각이란 성전 뜰 주위에 설치되어 있는 기둥과 지붕만 있고 벽이 없는 복도를 말하는데, 당시 성전에는 솔로몬의 행각과 왕의 행각이 있었습니다(그림). 베드로는 모여든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걸을 수 있게 된 것을 마치 사도들의 능력이나 경건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분명히 말합니다. “그 이름(예수)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이 사람이 낫게 된 것은 어느 개인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치유의 주체는 예수님이시며 사람은 단지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마치 개인의 능력으로 그런 일을 하는 양 자랑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 역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마 7:22, 새번역)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리켜 불법 곧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마 7:23). 바울은 그런 자들을 가리켜서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들이며,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고후 11:13). 한 마디로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 사탄의 일꾼들이라는 것입니다(고후 11:5). 사탄이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처럼(고후 11:4) 사탄의 일꾼이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그들이 사람들을 유혹했고,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 미혹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요일 4:1). 보이는 현상에 집착하지 말고, 그런 일을 행하는 사람이 아닌 그런 일을 행하도록 하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오직 예수의 이름만을 강조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했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으며, 예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습니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또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행 3:19). 한 마디로 제자들과 그들이 행한 권능은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도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막 16:15). 제자들에게는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이름만이 전부였습니다(행 3: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걷게 되었다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크고 놀라운 사건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입니다(엡 2:5).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는 그가 누구든지 구원을 얻고(행 2:21 ; 롬 10:13)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요 1:12). 예수 그리스도 외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은 없고(행 4:12),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다른 길도 없습니다(요 14:6).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믿음으로만 됩니다. 그 이름만이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요 5:24). 그 이름을 의지하므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