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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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0장 19절 ~ 25절 [개역개정]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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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과 9장에서 첫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해 언급했던 히브리서 기자는 10장에서도 두 언약을 비교하며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한 마디로 첫 언약인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 참 형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림자는 참 형상을 미리 보여주는 모형에 지나지 않으며, 실체가 오면 더 이상 필요 없게 됩니다.
옛 언약인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참 형상 곧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입니다. 따라서 율법이 정한 제사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제사와 관련된[제의적] 표현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율법이 정한 제사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이 단번에 깨끗하게 되어 더 이상 죄를 의식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제사를 드리는 일도 중단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이 정한 제사들은 해마다 자기의 죄를 생각나게 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죄를 깨끗하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히 10:4). 사람이 범한 죄는 사람의 생명으로 갚아야지 짐승으로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창 9:5-6). 그럼에도 해마다 대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간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를 가지고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실 것(히 9:12)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였습니다. 이제 참 형상인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에 더 이상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갈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히 10:10).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그 양심이 깨끗하게 되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고(히 9:14), 또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히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 10:19).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히 10:19).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입니다(히 10:22).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은 거짓이나 꾸밈없는 진실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데, 이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믿음이나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믿음은 신앙의 기초적인 것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온전한 믿음은 아닙니다. 온전한 믿음이란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이고 절대적인 신뢰를 의미합니다(엡 4:13). 이러한 믿음과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이어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몇 가지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1.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아야 합니다.
23절 말씀입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믿는 도리의 소망’은 ‘우리가 고백하는 소망’이란 의미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구원을 말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 구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약속하신 분은 미쁘시기 때문입니다. ‘미쁘다’는 말은 ‘믿을 만하다’라는 뜻으로,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고백하는 소망을 굳게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
24절 말씀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사랑’은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을 말하며, ‘선행’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서로 관심을 가지고 격려하며 사랑과 선한 일들을 힘써 행할 때 공동체는 용기를 잃지 않고 소망 가운데 굳게 설 수 있을 것입니다.
3.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25절 말씀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초대 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모이기를 힘썼습니다(행 2:42-47). 그러나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모임은 점점 식어져 갔습니다. 급기야는 모이기를 중단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신앙생활을 하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모임을 중단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초대 교회 때는 박해가 주원인이었으나 지금은 그 원인이 다양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그럴수록 모이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마 24:36) 반드시 그날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그리스도께서 오시든지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는 항상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힘든 일이 있어도 누군가 격려하고 위로해 주면 대부분 용기를 얻어 그 일을 견뎌낼 수 있지만 혼자서는 쉽게 낙담하고 포기해 버리기 일쑤입니다. 전도서에 보면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고 했습니다(전 4:9).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협력할 때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귀를 타고 험악한 광야 길을 가게 되었는데, 그만 나귀가 놀라서 날뛰는 바람에 떨어져 크게 다쳤습니다. 다행히 동행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곁에 아무도 없었다면 큰 위험에 처했을 것입니다(전 4:10). 또 어떤 사람이 혼자서 여행할 때 강도를 만나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지만 두세 사람이면 강도와 맞설 수 있습니다(전 4:12).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흔히 광야에 비유하는데, 그만큼 인생살이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그 일로 삶의 의욕까지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누군가 옆에서 격려해 주고 위로해 준다면 그는 용기를 얻고 다시금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도 인생과 같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며 서로를 돌아보고 격려할 때 하나님께서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4. 담대함을 버리지 말고 인내해야 합니다.
35절과 36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히브리서가 쓰여질 당시는 성도들 특히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 고통을 받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동족인 유대인들과 로마제국으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어떤 박해를 받았는지 33절과 34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그들은 때로 모욕과 환난을 당하여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고, 자신의 소유를 빼앗기는 일도 있었습니다.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것은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처형당하는 것을 묘사한 말입니다. 본서의 수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박해를 받았습니다. 처음엔 잘 견디어 냈으나(히 10:32) 시간이 지날수록 박해를 피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에게 다시 유대교로 돌아간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며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므로(히 10:29) 결코 사함을 받지 못하고(히 10:26)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히 10:27).
아울러 그들이 처음 박해받았을 때의 일을 상기시킴으로 그때 가졌던 담대함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인내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재산을 빼앗기는 일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 있는 것들보다 더 좋고 영원한 소유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히 10:34).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큰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히 10:35). 이 상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찾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온전한 구원의 축복입니다(히 9:2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은 초대 교회 때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국제오픈도어선교회가 발표한 2024년도 ‘세계 기독교 박해지수(World Watch List)’에 따르면 전 세계 기독교인 7명 중 1명이 신앙을 이유로 박해받고 있으며, 그중의 약 5천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www.opendoors.or.kr).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한 그 순간부터 고난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모두 박해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딤후 3:12). 그 고난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큰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롬 8:18 ; 히 10:36).
이제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히 10:37 ; 합 2:3). 곧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지금 당장은 어렵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손해를 보고, 답답한 일을 겪어도 참고 견디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서 멸망할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들 즉 믿음을 가져서 생명을 얻을 사람들입니다(히 10:39). 그러므로 어떤 고난이나 환난이 온다고 하더라도 담대함을 가지고 끝까지 인내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하신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마 2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