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음TV/수요예배설교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2024. 8. 15.
성경본문 보기

사도행전 5장 17절 ~ 32절 [개역개정]

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22 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23 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4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25 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27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설교문 보기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이후 예루살렘 교회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크게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고(행 5:11), 계속되는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를 통하여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행 5:14). 심지어 사람들은 베드로가 지나갈 때 혹시 그의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바라며 환자들을 들것과 자리에 눕힌 채 거리로 데리고 나왔습니다(행 5:15). 이를 미신적인 행동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림자를 통해서라도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는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나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대로 행했더니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막 5:27-29). 또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다고 했습니다(행 19:12). 그처럼 사람들은 베드로의 그림자를 통해서라도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에서 그러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주변에 있는 여러 마을로부터 수많은 사람이 병든 자들과 더러운 귀신에게 시달리는 자들을 데리고 와서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행 5:16). 이는 하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사실임을 확실히 증명해 주었습니다(막 16:20).

아울러 성도들의 삶은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습니다(행 5:13). 비록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칭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마 5:16).

예루살렘 교회가 더욱 부흥하자 대제사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로서 일전에 베드로와 요한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결코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했던 자들입니다(행 4:18). 그럼에도 사도들이 계속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칠 뿐 아니라 표적과 기사를 행하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그들은 매우 화가 났습니다. 한편으로는 시기하는 마음이 가득했는데, 백성의 마음이 사도들에게로 쏠리면 쏠릴수록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기 때문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로 인해 예수님의 부활이 널리 전파되고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게 되면 부활이 없다던 자신들의 주장은 거짓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종교 지도자로서 그들의 권위는 크게 손상될 것입니다. 더욱이 민란이라도 일어나면 그동안 자신들이 누려왔던 모든 권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는데, 이는 지난번처럼 사도들을 산헤드린 법정에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행 4:3).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제사하는 거룩한 직분을 맡은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장이 아니라 마귀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자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결정하고 선동했으며,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을 핍박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막는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하시는 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들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비록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사 그들을 풀어주심으로 계속 생명의 말씀 곧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행 5:20).

사도들은 천사의 지시대로 이른 아침 성전으로 들어가서 가르쳤습니다. 그 시각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고 감옥에 사람들을 보내어 사도들을 데려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성전 경비병들은 감옥에 가서 사도들이 없는 것을 보고 돌아와 그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감옥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고, 지키는 사람들은 문 앞에 서 있었는데, 문을 열어보니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성전 맡은 자 곧 성전 경비대장과 대제사장들은 몹시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동안 사도들을 통해 일어난 표적과 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를 통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같은 일을 보고 들으면서도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안위만을 걱정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명예]가 손상되고 기득권[권력]이 위협받게 될 것을 우려한 것입니다. 그들은 내세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현세 곧 이 세상에만 관심 갖는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삶만을 생각한다면 저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세가 아닌 내세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온갖 박해를 받았지만 굴하지 않았고, 자기 재산을 빼앗길 때도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 있는 것들보다 더 좋고 영원한 소유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고 또 믿었기 때문입니다(히 10:34). 우리도 이 세상이 아닌 내세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전부인 양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잠시 거쳐 가는 일시적인 처소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본향은 이 세상이 아닌 저 하늘에 있습니다(히 11:16). 우리는 언젠가 그곳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날을 소망하며 현세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현세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성전 경비대장과 대제사장들이 사도들의 일로 당황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와서 그들에게 "보십시오, 여러분이 옥에 가둔 그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행 5:25) 하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러자 성전 경비대장이 그의 부하들을 데리고 나가 사도들을 다시 잡아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들을 돌로 칠까 봐 두려워서 폭력을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작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세상에 속한 사람들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합니다(마 10:28). 사도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섰으나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의 최고 법정으로 사형을 선고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대제사장이 그들에게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라고 했을 때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행 5:29). 지난번 때도 그랬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결코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하자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했습니다(행 4:19). 종교 지도자들의 계속되는 위협에도 사도들은 여전히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항변했습니다.

나아가 그들에게도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 5:30-31). 비록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결정하고 선동했으나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라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때 베드로는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행 2:23-36). 그때 사람들은 베드로가 하는 말을 듣고는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찔려’라는 말은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으로 인해 마치 뾰족한 것에 찔려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그렇게 마음 아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자신들의 죄를 깨달은 사람들이 심한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애통하며 탄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의 말을 듣고 오히려 분노했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중의 바리새파 사람인 가말리엘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 학자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으며, 사도 바울의 스승이기도 합니다(행 22:3). 그가 노년에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가말리엘은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내보낸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행 5:35-39)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도록 신중하게 판단하고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드다나 갈릴리의 유다처럼 무너질 것이지만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정대로 하지 말고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비단 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해당이 되는 교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옳고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일이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습니다(잠 14:12). 그러므로 매사에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도록 기도하면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가말리엘의 충고를 받아들여 사도들을 죽이려는 계획을 취소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그냥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을 채찍질 한 뒤에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한 후에 놓아주었습니다. 이 일로 사도들은 의기소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예수님을 위해 모욕당할 만큼 가치 있는 자로 여김을 받게 된 것을 기뻐했습니다(행 5:41). 예수님 때문에 모욕당하는 것을 수치가 아닌 영광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드린 공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성전에서 그리고 이집 저집 다니면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심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선포했습니다(행 5:4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의 상이 큼이라”라고 했습니다(마 5:11-12).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박해를 당할 것입니다(딤후 3:12). 여기에 예외는 없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랬고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으로 인하여 박해를 받을 때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로 인해 세상과 타협하거나 신앙 밖으로 나가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며 예수님으로 인하여 받는 박해를 기꺼이 감당했던 것처럼(히 11:35-38) 우리도 장차 가게 될 천국을 소망하며 어떤 어려움도 잘 참고 견디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