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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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9장 20절 ~ 28절 [개역개정]
20 모르드개가 이 일을 기록하고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에 있는 모든 유다인에게 원근을 막론하고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21 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아달월 십사일과 십오일을 지키라
22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
23 유다인이 자기들이 이미 시작한 대로 또한 모르드개가 보낸 글대로 계속하여 행하였으니
24 곧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모든 유다인의 대적 하만이 유다인을 진멸하기를 꾀하고 부르 곧 제비를 뽑아 그들을 죽이고 멸하려 하였으나
25 에스더가 왕 앞에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왕이 조서를 내려 하만이 유다인을 해하려던 악한 꾀를 그의 머리에 돌려보내어 하만과 그의 여러 아들을 나무에 달게 하였으므로
26 무리가 부르의 이름을 따라 이 두 날을 부림이라 하고 유다인이 이 글의 모든 말과 이 일에 보고 당한 것으로 말미암아
27 뜻을 정하고 자기들과 자손과 자기들과 화합한 자들이 해마다 그 기록하고 정해 놓은 때 이 두 날을 이어서 지켜 폐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28 각 지방, 각 읍, 각 집에서 대대로 이 두 날을 기념하여 지키되 이 부림일을 유다인 중에서 폐하지 않게 하고 그들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기념하게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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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의 명칭은 주인공인 에스더의 이름을 따서 지었습니다. 그런데 에스더보다는 모르드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만큼 모르드개는 본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아말렉 사람 하만 역시 본서에서 빼놓을 수 없는데, 둘의 관계는 마치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사이의 대립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 둘의 관계와 그들의 결말은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교만한 자는 멸망하지만 겸손한 자는 존귀히 여김을 받습니다.
하만은 교만한 자의 대명사라고 할 정도로 매우 거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교만하게 만든 것은 세상의 것들 곧 돈과 권력과 명예였습니다. 재산도 많고, 아들도 많으며, 왕 다음으로 높은 자리에 앉게 되자 교만이 하늘을 찔렀습니다(에 5:11). 더욱이 왕후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왕과 함께 청함을 받은 자는 자기밖에 없다며 자랑스러워했습니다(에 5:12).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말입니다. 하지만 그 잔치가 영광의 자리가 아닌 멸망의 자리라는 걸 하만은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왕과 하만은 에스더가 베푼 두 번째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왕은 그 자리에서 에스더에게 재차 소원을 묻습니다. 그제야 에스더는 자신과 자기 민족이 죽게 되었으니 살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에 왕이 그런 일을 하려고 마음먹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냐고 하자, 에스더는 그가 바로 하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만은 에스더와 그 민족을 해하려고 하는 사람이 설마 자신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에스더가 자기의 민족과 혈통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에 2:10) 하만은 그녀가 유대 민족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와 그 민족을 해하려 하는 자가 하만이라는 말을 듣고는 몹시 놀랐습니다. 그는 왕이 가장 신임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왕은 하만으로부터 왕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한 민족이 있는데, 그 민족을 진멸시켜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고, 허락한 적이 있습니다(에 3:8-11). 그 민족이 설마 에스더의 동족이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왕은 화가 나서 잔치 자리를 떠나 왕궁 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만은 왕이 자기에게 벌을 내리기로 마음먹은 것을 알고는 에스더가 앉아있는 긴 의자에 엎드려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게 된 왕은 하만이 왕후를 겁탈하려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사의 식습관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보통 긴 의자에 몸을 비스듬하게 누운 자세로 식사했습니다. 그런데 하만이 에스더가 누워있는 그 의자에 엎드려 간청하는 모습이 왕의 눈에는 마치 왕후를 겁탈하려는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이에 왕은 “저가 궁중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까지 하려는가”하고 말했습니다. 이는 하만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왕의 입에서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하만의 얼굴을 천으로 덮었습니다. 그때 한 내시가 왕에게 ‘하만이 왕을 위하여 충성된 말로 고발한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자기 집에 높이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세웠다’는 사실을 알립니다(에 7:9). 그러자 왕은 그 나무에 하만을 달라고 명령했습니다.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만들었던 나무에 하만 자신이 달리게 된 것입니다(에 7:10).
반면에 모르드개는 하만을 대신하여 왕의 다음 자리에 앉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는 유다 사람들 사이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았는데, 그가 자기 백성의 유익을 구하고 그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힘썼기 때문입니다(에 10:3). 만일 모르드개가 교만했다면 그는 사람들에게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을지는 몰라도 존경과 사랑을 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잠언 기자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라고 했습니다(잠 18:12). 사람의 마음이 교만하면 멸망이 뒤따르지만, 겸손하면 영광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하만과 모르드개가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를 내세우기보다는 자신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자기의 재산이나 자녀나 지위를 자랑하기보다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늘 겸손히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2.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결국은 승리합니다.
아달월 곧 십이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대인을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는 조서가 각 지방에 전달되자 유다 사람들은 크게 슬퍼하고 금식하며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베옷을 입고 재에 누웠습니다(에 4:3). 비록 그날까지 11개월의 시간이 남았으나(에 3:12-13) 자신이 죽을 날과 어떻게 죽을지를 알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그들에게 좋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하만이 죽은 후 에스더는 모르드개가 자신과 어떤 관계인지를 왕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왕은 하만에게서 거둔 반지를 빼어 모르드개에게 주었는데, 이는 그에게 자신의 권위를 부여한다는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에 3:10). 그렇다고 모르드개가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역시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왕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다시 왕에게 하만이 각 지방에 있는 유대인을 진멸하려고 쓴 조서를 철회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왕이라 할지라도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친 조서는 취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모르드개와 에스더에게 그들의 뜻대로 조서를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치라고 했습니다. 이에 모르드개는 각 지방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그들을 치려 하는 자들을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되 아달월 십삼일 곧 하만이 유대인들을 진멸하라고 한 그날 하루 동안에 하게 했습니다(에 8:11-13).
이 조서가 각 지방에 전달되자 유대인들은 기뻐하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당일인 아달월 십삼일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대적들을 제거했고, 이튿날인 14일에는 수도인 수산 성에서 다시 그들의 대적을 없앴습니다(에 9:15). 유대인의 대적들이 그들을 제거하기를 바랐던 그날에 유대인들은 도리어 그들의 대적을 제거하게 된 것입니다(에 9: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셨습니다(요 16:33).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지만(딤후 3:12) 결국은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택한 백성을 대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승리의 그날을 바라보며 어떤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르드개는 각 지방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아달월 십사일과 십오일을 절기로 지키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날은 유다 사람들이 그들의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을 얻은 날로서,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즐거움이 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서로 예물을 주며(에 9:19)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했습니다(에 9:22). 유대인들은 이 두 날을 부르(제비)의 이름을 따라 ‘부림’이라 불렀고, 정한 때에 이 절기를 지키기로 작정했습니다(에 9:26-27).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부림절을 축제의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절기를 지키라고 한 것은 단순히 그날을 기념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곳곳에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유대 민족은 대적의 손아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 절기를 지킬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해야 했습니다.
신약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어느 특정한 날이나 일에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과 모든 날에 감사해야 합니다(살전 5:18).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여느 교회들처럼 신앙으로 인해 환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살전 3:4). 그런 처지에 있는 교인들에게 바울은 감사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일이 잘 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운이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반대로 일이 잘 안 되면 재수가 없다거나 운이 안 따랐고 생각합니다. 하늘을 원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그런 자들이 어떻게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형편에 있든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해야 하고 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만물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롬 8:28).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 이루어 주실 것을 믿을 때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언제 어디에 있든지 늘 보호하시고 지켜 주십니다. 도저히 구원받지 못할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크신 능력으로 구원하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용기를 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환난을 당하나 결국은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고(계 7:17),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계 21:4). 우리는 그날을 소망하며 신앙으로 인한 어떤 고난도 잘 참고 견디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