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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2024.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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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장 1절 ~ 10절 [개역개정]

1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4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5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6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7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8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9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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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에 대한 사탄의 첫 번째 시험은 물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물질’이라 함은 ‘재물’을 달리 이르는 말인데, 재물뿐만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욥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가장 큰 부자였고, 그만큼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과 그의 가정과 그의 모든 것을 지켜 주시고, 그가 하는 일마다 복을 주셔서 그의 소유를 많게 하셨으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치면 틀림없이 주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욥을 참소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욥이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몸에 손을 대지 말라는 조건으로 사탄의 시험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시험으로 욥은 비록 자신의 소유를 모두 잃었으나 신앙만은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예수님께서도 사탄 곧 마귀(계 12:9)에게 물질에 관한 시험을 받으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40일 동안 금식하신 예수님께서는 배가 고프셨는데, 그때 마귀가 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령하여 이 돌들이 떡이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마 4:3). 돌을 떡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라서 한 말이 아닙니다. 마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마 8:29 ; 막 1:24). 그럼에도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은 말 그대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마귀가 노린 것은 ‘배고픔’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전에 먼저 배고픔부터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일의 우선순위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일도 중요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부터 먼저 해결해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문제로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6:33). 반대로 순서를 바꾸어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를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염려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마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기 전에 먼저 떡을 만들어 배고픔부터 해결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귀의 시험에 예수님께서는 신명기(8:3)의 말씀으로 답변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사람의 생명이 떡으로만 즉 먹는 것으로만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먹어야 삽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은 무엇이든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 먹을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을 굶어 죽게 하느냐.”며 그들을 원망했습니다(출 16:3). 이는 모세와 아론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출 16:7). 그리고 이러한 원망은 불신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굶어 죽게 하실 리가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먹을 게 없다고 아우성을 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의지하지도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이런 일이 벌써 세 번째입니다. 출애굽 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출 16:1).

하나님께서는 먹을 양식이 없다며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습니다(출 16:4).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40년간 먹은 양식입니다(출 16:35). 모세는 가나안 입성을 앞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신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떡은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이란 것이 떡으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혼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염려하며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이러한 문제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마 6:32).

예수님께서는 ‘까마귀를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2:24).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서 까마귀는 별로 달갑지 않은 새입니다. 부정한 짐승이기 때문입니다(레 11:15).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기르십니다(마 6:26). 또 두 마리를 한 앗사리온, 우리나라 돈으로 몇천 원 정도에 살 수 있는 참새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물며 그들보다 더 귀한 사람이겠습니까?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자녀요, 백성입니다(행 20:28).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걸 주실 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기만 하면 일반적인 방법이 아닌 특별한 방법으로도 우리를 먹이실 수 있고 또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실 수 있습니다. 만나는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질에 관한 시험은 마귀가 주는 가장 기본적인 시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물질은 신앙에 있어서 가장 약한 고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이 부분을 집요하게 노립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만나의 교훈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얼마 후 참소하는 자 사탄이 다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 하나님께서 물으시자 사탄이 대답합니다.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사탄은 자신의 운명이 다할 때까지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일을 결단코 멈추지 않습니다.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사탄은 그곳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믿음에 굳게 서있어야 합니다(고전 16:13).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욥 2:3) 사탄은 이때다 싶어 다시 욥을 참소합니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 2:4) ‘가죽으로 가죽을 바꾼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뒤에 오는 말과 관련이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재물보다 소중한 것이 건강이고 건강보다 중요한 게 생명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생명을 지키려 합니다. 사탄은 욥이 육체적으로 고난을 받으면 여느 사람들처럼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고 신앙을 떠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탄은 욥을 쳐서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온몸에 종기가 나게 했습니다(욥 2:7). 얼마나 심했던지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을 정도였습니다. 재에 앉아서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는 욥의 모습은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의 아내가 던진 한 마디는 욥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그 누구보다 욥을 위로해 주어야 할 그의 아내가 도리어 신앙을 버리라고 종용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죽으라고 까지 말합니다. 이는 사탄이 그의 아내를 통해 욥을 실족게 하려는 술책이었습니다. 사탄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만일 그러한 방법으로 자기의 목적을 이루려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사탄을 따르는 것입니다. 결과나 목적이 수단이나 방법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목적이 선하고 결과가 좋으면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사용해도 된다거나 상관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무슨 일이든 그 목적은 선해야 하며 그것을 이루려는 수단과 방법 역시 순수하고 정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비방거리를 주지 않습니다(출 32:25 ; 삼하 12:14).

비록 사탄이 비열한 방법을 사용해 욥을 넘어뜨리려 했으나 욥은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 2:10) 욥은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이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입술로 죄를 짓지도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모두에게 찾아오며, 그 이유도 다양합니다.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일 수 있고, 욥처럼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자에게 오는 고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대하는 태도나 방식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힘이나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고난을 이겨내려고 합니다. 하다가 안 되면 포기하고 고난 앞에 주저앉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고난을 겪을 때 조급해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귀는 사람들을 낙심케 하고 포기하게 만듭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속이며 신앙을 포기하라 종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선지자들이 온갖 고난을 받으면서도 인내했던 것처럼(약 5:10)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그 누구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위해 갖은 고난과 멸시를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를 언제나 돕고 계시는 성령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떤 고난도 참고 견디어 결국에는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그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은 더욱 성숙하고 견고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