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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2024. 9. 18.
성경본문 보기

사도행전 9장 1절 ~ 9절 [개역개정]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설교문 보기

성경에는 사울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럿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도 한 명이 있는데, 그는 바울이란 이름으로 더 알려진 사울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나 바울은 모두 베냐민 출신입니다(삼상 9:21 ; 빌 3:5).

바울은 길리기아 지방의 다소에서 태어난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는데(행 22:28), 이는 그의 아버지가 로마 시민권자였음을 의미합니다. 당시에 로마 사람이 아닌 자가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는 로마 정부나 고위층 관료를 위해 큰 공헌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 대가로 로마의 시민권이 주어졌습니다. 또 영화 벤허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 입양되면 그 역시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 황제들이 국고를 충당하기 위해 시민권을 공개적으로 팔았습니다. 그래서 돈만 있으면 시민권을 살 수 있었습니다(행 22:28). 로마의 시민권을 갖게 되면 로마 제국이 지배하고 있는 곳 어디에서나 신분을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 역시 그 권리를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행 22:25).

바울은 ‘작은 자’란 뜻의 로마식 이름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으로서 사울이라는 히브리식 이름도 있었습니다(행 13:9).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과 로마식 이름인 바울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는 바울처럼 로마식 이름과 히브리식 이름 둘 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몇 있습니다(행 1:23 ; 12:12 ;  13:1). 바울이 성경에 처음 등장한 것은 스데반이 순교할 때입니다(행 7:58). 스데반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받던 중 유대인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려 나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 자리에 바울이 있었다는 것은 그가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 자신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출생했고, 예루살렘에서 성장했으며,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 교육을 받았습니다(행 22:3). 가말리엘은 바리새파 사람으로 당대 유명한 율법 교사요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행 5:34).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에 대해 엄격한 교육과 철저한 훈련을 받았으며 여느 바리새인들처럼 주의 제자들 곧 그리스도인들을 혐오했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죽임 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으며(행 8:1), 그 역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남자든 여자든 닥치는 대로 끌어다가 감옥에 보냈습니다(행 8:3). 그것도 모자라 외국에 있는 도시에까지 까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에 이르렀습니다(행 26:11). 다메섹도 그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에 있는 여러 회당에 보낼 공문을 요청했습니다.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내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것이었습니다(행 9:2). 당시 다메섹에는 많은 유대인이 있었으며 회당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곳에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 때 흩어졌던 그리스도인들이 일부 있었고(행 8:1), 그들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잡아 오기 위해 대제사장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다메섹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게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이에 관한 내용이 22장과 26장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종합해서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때는 햇빛이 가장 강한 시간인 정오였습니다(행 22:6). 그런데 그 빛보다 더 밝은 빛이 바울과 그 일행을 둘러 비췄습니다(행 26:13). 그 순간 바울과 그 일행은 땅에 엎드려졌고, 히브리 말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행 9:3 ; 22:7). 다른 사람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고, 오직 바울만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행 22:9). 바울이 “주님은 누구십니까”라고 묻자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행 22:9) 예수라”고 대답하셨습니다(행 9:5). 바울이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2:27 ; 엡 1:23). 바울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빛 가운데 나타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시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자기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교회를 없애려고 한 일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일을 기뻐하실 것이라 여겼습니다(행 26:9). 그런데 그 일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요 16:2). 그들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요 16:3). 이는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덮어놓고 믿는 맹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과 같은 실수를 하지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요 5:39). 그런데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도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믿지 않으면 결국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배척할 수밖에 없습니다(고전 2:8).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처럼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살전 2:13). 또 베뢰아에 있는 교인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되, 그 말씀이 사실인지 성경을 통해 확인해야 합니다(행 17:11). 덮어놓고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바울은 예수님께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행 22:10). 이 질문에는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일들과 자신의 신념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뉘우치며 앞으로 주님을 위해 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단순히 자기 잘못을 후회하고 뉘우치는 게 아니라 마음과 삶의 방향을 주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살전 1:9). 바울은 지금까지 잘못된 길을 걸어왔으나 앞으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행 9:6 ; 22:10).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일어났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빛의 광채로 인해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행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 유다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 머물렀습니다(행 9:11). 그는 그곳에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기도하는 중이라고 하셨습니다(행 9:11). 그가 무엇을 기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기간에 그는 철저히 깨어졌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환상 중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경건한 사람으로 다메섹에 있는 모든 유대인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행 22:12). 주님께서는 그에게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아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에 아나니아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행 9:13-14) 아나니아는 주의 성도를 박해하는 사람에게 왜 안수하라고 하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5-16) 예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도구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롬 11:13).

주님의 지시를 받고 바울을 찾아간 아나니아는 그에게 안수하며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라고 했습니다(행 9:17). 그런데 무엇을 하라는 구체적인 지시가 없습니다. 이에 대해 22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지시를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행 22:14-15) 내용은 조금 길지만 예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안수하자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들이 떨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으나 이제는 그들처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다메섹의 각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얼마 전까지 그는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의 이름 부르는 사람을 박해하였고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가기 위해 그곳에 왔기 때문입니다(행 9:21). 그런 바울이 그리스도를 전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처음에 바울은 몰랐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하나의 이단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교회를 없애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인 줄만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고 또 믿었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기 위해 열심이었던 바울이 도리어 그 도를 전파하는 사람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사실 바울만큼 이방인의 사도로 적합한 인물도 드물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정통했고, 헬라어에도 능통했습니다(행 21:37). 또 유대의 총독이었던 베스도가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 26:24)고 할 정도로 지식이 많았습니다. 반면에 외모는 보잘것없었던 것 같습니다. 2세기의 문헌으로 알려진 ‘바울과 테클라 행전’에 의하면, 그는 대머리에 안짱다리였으며, 자그마한 몸집에 눈썹은 맞붙어 있고, 다소 큰 매부리코를 가진 것으로 전해집니다. 게다가 무슨 병인지는 모르나 신체적인 지병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는 바울이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주신 질병이었습니다(고후 12:7). 이런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방 선교라는 중대한 사명을 맡기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외모보다 그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삼상 16:7).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과 강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어리석고 약한 사람들을 택하시고, 세상이 대단한 인물로 여기는 사람들을 형편없이 낮추려고 천한 사람과 멸시받는 사람과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전 1:27-29). 바울도 예외는 아닙니다. 비록 그가 위대한 사도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자랑할 것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기 때문입니다(고전 15:10). 그러므로 우리의 모습이 비록 초라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