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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2024.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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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장 20절 ~ 26절 [개역개정]

20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21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
22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23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24 나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내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
25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26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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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고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한 몸이라 할 정도로 가장 가까운 아내마저 신앙에서 떠나라고 욥을 종용했습니다(욥 2:9). 그의 아내는 자기 가정에 그리고 남편에게 재앙이 임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누구보다 진실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재앙이 임했다는 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록 이 모든 일에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지만, 왜 자신이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욥은 평상시에 이러한 재앙이 자신에게 닥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욥 3:25). 그래서 항상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죄악을 멀리하려고 애를 썼습니다(욥 1:1, 8). 그는 자기뿐 아니라 자녀들 역시 죄에 빠지지 않고 경건한 삶을 살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생일이 지나면 그들을 불러서 성결하게 하고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습니다. 혹시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라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죄를 지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 욥은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가장 큰 부자였지만 그것을 자랑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욥은 가난한 자라고 해서 그들을 업신여기지 않았고, 종이라고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재앙이 임하자, 욥은 그 원인이 무엇인지 혹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때 친구들이 욥이 당한 모든 일을 듣고 그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욥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한 걸 보고 소리 높여 울면서 자기들의 옷을 찢고 하늘을 향해 티끌을 날려 자기들의 머리에 뿌렸습니다. 그러고서 꼬박 일주일을 그와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었으나 욥의 고통이 너무 큰 것을 보았으므로 말 한마디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비록 대화는 없었으나 그들의 방문은 욥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라고 했습니다(롬 12:15). 별로 어려울 게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처럼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기자들이 이런 것들을 경계하라고 권면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라는 말처럼 겉으로는 함께 즐거워할 수 있으나 속이 어떤지는 하나님과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반대로 즐거운 일에 동참하는 것보다 슬픈 일에 참여하는 게 더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무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들은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비록 자신은 슬프지만 즐거워하는 자를 만나면 같이 즐거워함으로써 그의 즐거움을 더 크게 해주어야 합니다. 또 자신에게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어도 상대방에게 슬픈 일이 있으면 그 슬픔을 위로해 주고 함께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마땅한 삶의 모습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재앙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그를 위문하고 위로하기 위해 만사를 제쳐두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묵묵히 그의 고통에 동참했습니다. 일주일 후 드디어 욥이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며 울분을 토한 것입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을 것이라”(욥 3:11-16)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욥은 죽기를 갈망했습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태어나게 하셔서 빛을 보게 하시고, 이렇게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이런 사람들은 죽기를 기다려도 죽음이 찾아와 주지 않는다. 그들은 보물을 찾기보다는 죽기를 더 바라다가 무덤이라도 찾으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데, 어찌하여 하나님은 길 잃은 사람을 붙잡아 놓으시고, 사방으로 그 길을 막으시는가?”(욥 3:21-23, 새번역)

지금까지 욥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도 원망이나 불평 없이 잘 참아왔습니다. 그러나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극심한 고통은 계속되었고(욥 3:24), 그 고통이 언제 끝날지도 몰랐습니다. 왜 이런 재앙이 임했는지 알 수 없었고, 왜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자기의 삶을 한탄했습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낼 것만 같았던 욥도 결국은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고 말았습니다(욥 7:11 ; 21:4). 그런데 이러한 불평은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들의 불평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불신앙에서 비롯되었지만, 욥의 불평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데서 연유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늘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죄악을 멀리하려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욥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그 원인을 죄에서 찾았습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욥 4:7) 그들의 주장은 일면 타당성이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거두고(갈 6:7) 행한 대로 보응받는 것(롬 2:6)이 성경의 보편적인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는 대부분 인생의 종말에 적용이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그러한 원리가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욥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욥이 어떤 죄를 지어서 고난을 받는 게 아닙니다. 그의 고난은 죄에 대한 보응이나 징계가 아닌 신앙의 연단입니다(욥 23:10).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악인의 형통입니다(시 73:3). 어떤 자들은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고 거만하며,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함에도 오히려 평안과 부귀를 누립니다. 그들에게는 사람들이 흔히 당하는 고난이나 재앙이 없고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습니다(시 73:4-5). 아무 걱정 없이 살다가 평안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시 73:18). 그러므로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 할 수 없고, 고난을 받는다고 해서 그가 죄에 대한 보응을 받는 것이라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헬라어에는 인내를 뜻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크로뒤미아(μακροθυμέω)이고, 다른 하나는 휘포모네(ὑπομονή)입니다(골 1:11 ; 딤후 3:10). 한글개역성경에서는 전자를 ‘오래 참음’으로, 후자를 ‘인내’로 번역했습니다. ‘마크로뒤미아’는 문자적으로 ‘분노와 멀리 떨어져 있다’라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쉽게 화를 내거나 보복하지 않고 오래 참는 것을 의미합니다(잠 15:18). 이는 사랑의 속성이며(고전 13:4), 성령의 열매이기도 합니다(갈 5:22). 그리고 ‘휘포모네’는 ‘~아래 머물다’라는 뜻으로,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그러한 삶의 본이 될 만한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그들의 인내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약 5:10). 특히 주의 재림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약 5:8).

첫 번째로 소개된 사람은 농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8) 이스라엘의 농부들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면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립니다. ‘이른 비’란 파종할 때인 10월 말에서 11월 사이에 내리는 가을비를 말하고, ‘늦은 비’란 추수하기 직전인 3, 4월경에 내리는 봄비를 가리킵니다(신 11:14). 당시에 이른 비와 늦은 비는 농사에 있어서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적당한 때에 내리지 않으면 농사에 큰 타격을 입습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비를 기다리면서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때가 되면 비가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 조급해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려주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주의 재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정해진 사실입니다. 또 때와 기한도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행 1:7). 단지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을 뿐입니다(마 24:36).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조급해한다고 해서 앞당겨지거나 늦춰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농부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처럼(렘 5:24 ; 욜 2:23) 성도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며 어떤 고난이나 핍박 가운데서도 마음을 굳게 하고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소개된 사람은 구약의 선지자들입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약 5:10)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자들로서 그로 인해 고난을 받았지만 오래 참음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핍박을 받습니다(딤후 3:12). 그럴 때 우리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비롯한 믿음의 선조들을 생각하며 어떤 고난도 잘 참고 견디어 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소개된 사람은 욥입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자녀 그리고 건강까지 잃고 생명만을 겨우 부지하는 신세가 되었으나 신앙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고통과 불투명한 미래로 인해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신앙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 안에 머물며 인내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한없는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불평하거나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오래 참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