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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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0장 1절 ~ 8절 [개역개정]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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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갈리리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마 4:13, 17). 당시 가버나움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로마의 부대가 주둔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는데, 그중에는 어느 백부장의 하인도 있었습니다. ‘백부장’이란 백여 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부대의 지휘관을 말합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로마의 군인임에도 불구하고 피지배 민족인 유대인을 사랑했고, 회당까지 지어주었습니다(눅 7:5). 그것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어떤 유익을 바라고 한 건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단지 유대인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가버나움의 유대인들은 이런 백부장의 진심을 알았고, 그래서 그와 교제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본래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 사람들 곧 이방인과의 접촉을 금했습니다(행 10:28). ‘가나안 민족과 결혼하지 말라’는 신명기 7장 3절의 말씀을 확대 해석하여 모든 이방인과의 접촉을 금지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가버나움의 유대인들은 이방인인 백부장과 접촉하는 것을 기피하지 않았습니다. 백부장이 그들에게 자기의 종을 위해 예수님께 가서 도움을 청해달라고 부탁했을 때도 흔쾌히 수락했습니다(눅 7:4). 그만큼 백부장의 진심 어린 사랑에 유대인들은 크게 감동받았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고넬료도 가버나움의 백부장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는 이달리야(이탈리아) 부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행 10:1). 가이사랴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로 예루살렘 교회 일곱 집사 가운데 한 명인 빌립이 복음을 전했고(행 8:40), 또 정착한 곳이기도 합니다(행 21:8).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으로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경건’이란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언행을 삼가 조심하는 것’으로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경외’란 ‘공경하면서 두려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두려움은 단순한 무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와 거룩하심에 대한 존경에서 나오는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이 경외는 경건과 서로 연관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경건한 삶을 살 수 있고, 경건한 삶을 산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삶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정도로 가난한 자들을 많이 구제했고, 경건한 유대인들처럼 하루 세 번 항상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구제와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고, 하나님께서 기억하신 바 되었는데, 이는 고넬료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고넬료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야만 했습니다(요 1:12).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인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은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께 갈 수가 없습니다(요 14:6).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고넬료 가정에 보내셨는데, 그 과정은 이렇습니다.
하루는 고넬료가 제 구시 곧 오후 세 시쯤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환상 중에 하나님의 사자 곧 천사를 보았습니다. 천사가 말하길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고 하면서 그 장소를 알려주었습니다(행 10:4). 그때 베드로는 욥바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무두장이’란 짐승의 가죽을 이용해 옷이나 신발 등의 물건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고넬료는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모든 일을 이야기해 주고 욥바로 보냈습니다. 그들 역시 주인 혹은 상관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튿날 정오쯤 되어 욥바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과연 이방 사람인 고넬료에게 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의 교제를 법으로 금했습니다. 심지어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이방 출신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꺼릴 정도였습니다(갈 2:12).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도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욥바에 이르렀을 때 베드로는 기도하기 위해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행 10:9). 그는 기도하는 중에 배고픔을 느끼고 무엇을 좀 먹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상당 시간 기도하다가 배고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베드로는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늘이 열리면서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네 귀가 매여져 땅에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네 발 가진 짐승들과 땅에 기어 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거절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자기 안에 있는 짐승들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부정한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레위기의 규례에 따라 정한 것으로 분류된 짐승만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네 발 가진 짐승 중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으로(레 11:3) 소와 양, 염소, 사슴, 노루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신 14:4, 5). 이들은 특징은 모두 초식동물이며 다른 것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비교적 온순한 짐승들입니다. 그 외의 모든 짐승은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리고 곤충 중에는 메뚜기나 베짱이, 귀뚜라미 등 땅에서 뛰는 것만 먹을 수 있었고(레 11:21-22), 새들 가운데서 먹을 수 있는 것은 닭(느 5:18)이나 오리, 참새, 메추라기처럼 비교적 작은 새입니다(마 10:29). 베드로는 이제까지 이런 짐승들 즉 속되거나 더러운 것은 먹어본 적이 없었습니다(행 10:14). 그러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음성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 반복되었습니다(행 10:16). 이는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부정한 음식에 대한 규례가 완전히 폐기되었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모든 식물이 다 깨끗하다”라고 하셨습니다(막 7:19). 사실 하나님께서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주신 음식은 그 자체가 부정한 것은 없습니다(롬 14:14, 20).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다 좋은 것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딤전 4:4).
아울러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런 환상을 보여주신 것은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방인을 부정한 짐승처럼 취급했던 유대인들의 전통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구원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음을 보여줍니다(행 10:34 ; 롬 3:22).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구원을 얻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요 3:16). 그러므로 복음은 유대인에게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증거 되어야 합니다(행 1:8).
베드로가 자신이 본 환상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와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이 여기에 묵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셨습니다(행 10:19). 고넬료가 보낸 사람은 셋인데, 여기서는 두 사람만 언급되었습니다. 이는 사본의 차이입니다. 어떤 사본에는 두 사람으로 되어있고, 어떤 사본에는 세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예 그 수가 밝혀져 있지 않은 사본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지시를 받고 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는 그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넬료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을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이튿날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과 함께 길을 떠났는데, 욥바에 있던 몇 형제들도 함께 갔습니다. 베드로가 이들을 데려간 이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자신의 행적에 대한 증인을 삼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행 11:12). 즉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방문한 것이 문제가 되었을 경우 그 일을 변호해 줄 사람으로 그들을 데려갔다고 보는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가 가이사랴로 오고 있을 때 고넬료는 자기 가족뿐 아니라 그의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길 원했습니다. 그는 베드로가 들어오자, 그의 발 앞에 엎드려서 절을 했습니다. 이는 로마 황제나 신적인 존재에게 하는 행동으로 고넬료는 베드로를 마치 천사처럼 대우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런 대우를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자신은 신적인 존재가 아닌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행 10:26). 하나님 앞에서 사도나 일반 성도나 동등한 존재입니다. 맡은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서열이 아니라 섬김이며,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입니다. 그래서 일부 교회에서는 호칭에 직분을 빼고 형제, 자매로 부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요약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해 주셨는데, 이 예수님이 바로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시며,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라는 것이었습니다(행 10:36-43).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 말씀을 듣고 있던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 곧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선물로 부어 주시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습니다. 이방인들이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에 있었던 일과 매우 유사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행 11:15). 그때는 사람들이 각 언어(방언)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들었는데(행 2:11), 본문에서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었습니다(행 10:46). 여기서 말하는 방언이 외국어였는지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이 사람들이 우리처럼 성령을 받았으니 물로 세례 주는 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하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들 역시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대인들은 음식에 관한 규정들이 육체의 욕구를 절제하고 거룩함을 향하여 나가는 첫걸음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음식 규정을 통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9:2)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저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구원과는 먼 사람들이지만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저들의 의지는 본받을 만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상과는 구별된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언행에 늘 조심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