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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2024.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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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8장 1절 ~ 7절[개역개정]

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3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4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5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8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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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친구들은 그가 당하는 고통이 죄의 결과이며,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욥 5:8 ; 8:5).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결코 판단을 잘못하시거나 정의를 그릇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죄를 지은 자에게 임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주장한 대로 사람이 고난 받는 것은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일 수 있습니다. 인과응보, ‘행한 대로 보응받는다’라는 것은 성경의 원리입니다(렘 17:10 ; 롬 2:6). 결과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종말이든 혹은 역사적인 종말이든 세상 끝 날에는 행한 대로 보응을 받습니다(롬 2:7-10). 하지만 사람이 사는 동안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악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평안하며 재산이 늘어나는가 하면(시 73:3, 12), 어떤 사람은 선을 행했음에도 모든 걸 잃고 하루 종일 고통받기도 합니다(시 73:14). 욥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욥의 고난에 대한 친구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대해 욥은 이렇게 반박합니다.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욥 6:24)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보라는 것입니다. 욥은 비록 자신이 왜 고난을 받는지 알지 못했으나 그것이 자신의 죄 때문은 아니라고 확신했습니다(욥 6:29). 그래서 자신을 죄인 취급하는 친구들에게 화가 났고, 그러한 주장을 당장 멈추라고 경고했습니다.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욥 6:29) 그리고 한편으로는 친구들에게 대한 서운함도 내비쳤습니다.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욥 6:14) 설사 욥이 죄로 인해 고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친구라면 정죄가 아닌 위로를, 비난이 아닌 동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책망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에게는 위로와 동정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책망하더라도 온유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갈 6:1).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반할 것을 아셨음에도 책망보다는 먼저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것도 다른 제자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가룟 유다에 대한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에게 비난과 질타를 받았을 것이고, 회개의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라고 하셨습니다(마 26:21). 이미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하고 돈을 받은 상태였습니다(마 26:15).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죄를 깨닫거나 최소한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뻔뻔스럽게도 “저는 아니지요?”라고 되물었습니다(마 26:25). 또 요한이 “그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 사람이다”라고 하시며 빵 한 조각을 찍어다가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요 13:26). 하지만 유다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 13:1).

욥의 친구들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욥을 대해야 했습니다. 지금 욥에게 필요한 건 정죄가 아닌 위로였고, 비난이 아닌 동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 ‘그들은 욥의 상처에 기름 대신 초(vinegar)를 부었다’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기름은 상처의 통증을 완화시켜주지만(눅 10:34) 식초는 통증을 더 악화시킨다고 합니다(잠 25:20). 그들의 말은 욥에게 위로가 되기는커녕 욥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습니다.

욥은 친구들을 향해 계속 서운함을 토로합니다.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같이 지나가누나”(욥 6:15) 그들은 욥에게 있어서 형제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친한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개울의 물살같이 지나갔습니다. 여기서 개울(시내)은 중동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와디(wadi)를 가리킵니다. 와디는 비가 오면 금방 물이 불어났다가도 비가 그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이 보일 정도로 메말라 버립니다. 욥의 친구들은 마치 말랐다 불어났다 하는 와디처럼 변덕스럽고 신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와디는 농부나 여행자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정작 물이 필요한 때인 건기에는 메말라 있고, 물이 필요 없는 우기에는 넘쳐흐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와디는 상인들처럼 장거리 여행하는 자들에게는 실망을 안겨줄 뿐입니다. 그들이 목이 말라 물을 찾다가 시내를 발견하고는 잔뜩 기대하고 뛰어갔는데, 그물이 메말라 있음을 발견한다면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그들은 크게 낙심하며 좌절할 것입니다. 욥의 심정이 그랬습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위로를 받기 원했으나 오히려 그들은 욥을 책망하며 비난함으로써 그에게 좌절감만 안겨 주었습니다. 그래서 욥이 그들에게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욥 6:21). 메마른 개울처럼 그들은 욥에게 아무 도움도 안 되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욥은 친구들을 향해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친구를 팔아넘긴다”라는 말까지 합니다(욥 6:27). 고아란 부모가 없는 아이를 말하는데, 히브리어의 원 의미는 아버지가 없는 아이 즉 과부의 아들을 가리켰습니다. 고대에서는 빌린 돈을 갚지 못하면 채주가 그의 자녀들을 모아 놓고 종으로 삼거나 팔 아이들을 고르기 위해서 제비를 뽑았습니다(왕하 4:1 ; 느 5:5 ; 욜 3:3). 또 돈 때문에 형제나 친구를 팔아넘기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그랬고(창 37:28), 가룟 유다가 그런 짓을 했습니다(마 26:15). 이렇듯 친구들을 악한 자들로 묘사한 것은 그만큼 욥이 그들에게 실망하고 분노했음을 보여줍니다(욥 6:29).

그러고는 다시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습니다.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욥 7:1-3) 욥은 자신의 인생을 힘든 노동에 시달리는 종과 품꾼에 비유했습니다. 품꾼은 보통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일을 합니다(마 20:2-8). 주로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 밖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뜨거운 햇볕과 더위를 견뎌야만 했습니다(마 20:12). 더욱이 악한 고용주라도 만나면 혹사를 당했습니다. 종의 형편은 더 안 좋았습니다. 품꾼은 고용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곳에 가서 일하면 되지만 종은 그렇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종은 저녁 그늘 즉 해가 지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 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품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품삯을 기다린다는 건 그날의 일이 끝나기를 바란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욥은 그들처럼 여러 달째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종과 품꾼은 하루일과를 마치면 쉴 수 있었으나 욥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누울 때마다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지나갈까 하며 날이 샐 때까지 이리저리 뒤척거렸습니다(욥 7:4). 온몸에 퍼진 심한 종기 때문입니다(욥 7:5). 그의 몸은 온통 구더기와 먼지로 뒤덮였고, 그의 피부는 아물었다가도 다시 터져버렸습니다. 그의 몰골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습니다. 욥은 그런 날이 얼마나 더 지속될지 알 수 없어 두려웠고, 이전의 상태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절망했습니다(욥 7:7). 그래서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냈습니다(욥 7:11). 욥기 7장 12절부터 21절까지를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쉬운성경으로 보겠습니다. “내가 무슨 바다 괴물입니까?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히고 감시하십니까? 침대에 누우면 좀 편할까, 잠이라도 자면 고통을 잊을까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은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들을 통해서 두려워 떨게 하십니다. 이 몰골보다 차라리 숨통이라도 막혀 죽었으면 싶습니다. 사는 것도 싫고, 나는 영원히 살지도 아니할 것입니다. 내 날들은 한 숨 호흡이오니 내버려 두소서. 사람이 뭐 대단하다고 그렇게 소중히 여기십니까? 아침마다 살피시고, 순간마다 시험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침 삼킬 틈도 주지 않으십니까? 사람을 감시하시는 주님!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왜 나를 표적으로 삼으십니까? 내가 당신께 무슨 짐이라도 되는 것입니까? 주님,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내 잘못을 없애 주십시오. 이제 내가 흙 속에서 잠들 것인데 그때에는 주님께서 나를 찾으셔도 나는 없을 것입니다." 비록 욥이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내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의 진심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어서 자기 심정을 토로한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그런 그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고야 말겠다는 듯 계속 욥의 말에 반박했습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 이어 이번에는 수아 사람 빌닷이 나섰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심판을 잘못하시거나 정의를 그르치는 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욥 8:3). 하나님의 심판은 항상 정확하고 공정하다는 것입니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욥이 고난을 받는 것도, 그의 자녀들이 죽은 것도 결국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욥 8:4). 하지만 욥이나 그의 자녀들이 재앙을 당한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빌닷은 결과만을 가지고 원인을 단정 짓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이는 사건의 원인이 아닌 것을 참된 원인으로 판단하는 데에서 생기는 오류입니다. 이를 원인 오판의 오류 혹은 거짓 원인의 오류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런 오류를 범하기가 쉽습니다. 성경에서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행한 일을 전해주었습니다. 그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는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 그 피를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욥의 친구들처럼 불행을 죄의 결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무언가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희생제물을 드리는 사람들 즉 예배하고 있는 자들을 빌라도가 잔인하게 죽이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또 그들은 실로암에서 있었던 사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했을 것입니다. 실로암은 히스기야 왕 때 만든 연못으로, 이곳을 지키기 위해 망대가 세워졌는데, 이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 역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그들처럼 죽지 않고 자신들이 살아있다는 건 상대적으로 그들보다 의롭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눅 13:1-5). 물론 어떤 재난이나 불행한 사건이 죄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삼하 21:1 ; 삼하 24:13)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결과만을 가지고 쉽게 단정하거나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서 빌닷은 욥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5-7) 빌닷은 만일 욥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전능하신 분에게 자비를 구한다면, 또 욥이 정말 깨끗하고 정직하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회복시켜 주시고 번영케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전제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는 지금 욥이 죄인이고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가 의인이고 정직한 자라고 인정하셨습니다(욥 1:8). 그리고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말이 물질적인 번영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물론 욥은 물질적으로 이전보다 더한 복을 받았고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욥 42:12). 그렇다고 부자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원인 오판의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게 어렵다고 하셨습니다(마 19:23). 어렵다는 것이지 불가능하다는 게 아닙니다. 부자는 대체로 돈이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하나님보다 돈을 더 의지하게 되고, 결국은 돈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복이 아닌 영적인 복을 추구해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닌 하늘에 있는 것들을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이 아닌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빌 3: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문구가 액자로 만들어져 걸려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특히 교인이 운영하는 사업장에 가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가훈으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창대함은 물질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영에 속한 자들이고,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닌 하늘에 속한 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지내는 동안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고 또 우리가 가진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