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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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장 20절 ~ 22절 [개역개정]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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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믿음의 선조들 가운데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그의 아들인 이삭을 비롯해 야곱과 요셉의 믿음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이삭
20절에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들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행하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루고 그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라는 약속이었습니다(창 12:2 ; 15:18).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이삭에게도 주셨고(창 26:2-5), 이삭은 이 약속을 근거로 두 아들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 내용이 창 27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 27:28, 29) 본래 이 축복은 장자인 에서가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이 축복을 가로챘습니다(창 27:35). 물론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고(창 25:34) 그것을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팔았기 때문에(창 25:33) 그 권리를 상실했습니다.
이삭은 야곱이 에서인 줄 알고 그에게 장자의 축복을 했으며(창 27:23), 후에 이 사실을 알았으나 그 축복은 무를 수 없었습니다(창 27:33). 어쩌면 이삭은 이 일을 통해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해 예언하신 것을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두 민족이 태중에서부터 나누일 것인데,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하겠고 큰 자(형)가 어린 자(동생)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창 25:23). 이 예언은 리브가로부터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은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장자는 자신이고 그러기에 그 축복은 당연히 자기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한 망령된 행동은 잊어버린 채 오직 축복만을 받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습니다. 에서는 장자로서의 축복을 받지 못하자 대신에 다른 축복이라도 받기를 원했습니다(창 27:38). 이에 이삭은 에서를 축복했는데, 야곱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창 27:39, 40).
비록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으나 히브리서 기자는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이삭이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두 아들에게 축복했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먼 훗날의 일이긴 하지만 그 축복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처럼 이삭은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하는 믿음의 본질을 잘 보여준 인물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삭은 온유의 본이 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온유함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죠? 바로 모세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는 당시에 어떤 사람보다도 온유한 자였습니다(민 12:3). 그런데 이삭도 그 못지않았습니다. 이삭의 온유함을 잘 보여주는 한 사건이 있습니다. 그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고 있을 때(창 25:11)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창 26:1). 그래서 이삭은 블레셋 땅에 있는 그랄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이삭은 블레셋 사람들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는데 그 해에 백 배를 수확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수확하는 양보다 백 배나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창 26:12). 그리고 가축과 종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살아 있을 당시 그의 종들이 판 우물들(창 21:30)을 모두 메워 버렸고(창 26:15), 이삭을 그 땅에서 나가게 했습니다. 할 수 없이 이삭은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곳에서 이삭의 종들이 우물을 파다가 샘을 발견했는데, 그랄의 목자들이 그 물은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삭의 목자들과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의 종들은 또 다른 우물을 파야 했습니다.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에는 우물을 파는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물길을 찾는 것도 어렵지만 파는 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깊게는 수십 미터까지 파 내려가야 했습니다. 야곱의 우물(요 4:6)이 이십 미터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삭은 이 우물을 양보했습니다(창 26:20). 이후에도 다른 우물을 팠으나 같은 이유로 넘겨주었습니다(창 26:21).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관대한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삭의 온유함입니다.
진정한 온유는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자에 대하여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는 이웃과 화평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삭은 이러한 성품으로 인해 결국 블레셋 사람들과 다시 화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빌 4:5).
2. 야곱
21절입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야곱 역시 이삭처럼 미래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임을 믿고 요셉의 아들들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했습니다. 그 내용이 창세기 4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창 48:15, 16) 이는 자신이 아버지 이삭에게 받은 축복을 그대로 요셉의 아들들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창 48:20). 이스라엘 사람이 축복할 때 그들의 이름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너를 에브라임과 므낫세처럼 되게 하시기를 원한다’라고 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큰 복을 받게 될 것임을 시사합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 사회에서는 서로를 축복할 때 이 말을 격언처럼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했다’라는 창세기 47장 31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히브리서 기자는 ‘침상’을 ‘지팡이’로 바꾼 것일까요? 이는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 역(LXX)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 번역을 따랐다기보다는 그 속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팡이는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나그네를 상징하는 물건이었습니다(막 6:8).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스스로 자신들을 외국인과 나그네로 고백했다고 했습니다(히 11:13).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가 ‘침상’ 대신 ‘지팡이’라는 단어를 인용한 것은 야곱의 삶이, 더 나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나그네 인생임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야곱은 그가 고백한 대로 고달프고 험난한 인생을 살았으나(창 47:9) 그럼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요셉
22절입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은 언제가 될지는 모르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사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앞두고 그 사실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했고, 그때 자기 유골을 가지고 나가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출 13:19 ;수 24:32).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그는 그의 언약 곧 천 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이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고 이삭에게 하신 맹세이며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원한 언약이라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에게 할당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시 105:8-11). 그리고 요셉에 대해서는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시 105:17-19). 여기서 ‘여호와의 말씀’이란 꿈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킵니다(창 37:5-11).
요셉은 두 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는 요셉이 형들과 밭에서 곡식 단을 묶었는데, 요셉이 묶은 단은 일어나 똑바로 서고 형들이 묶은 단은 요셉의 단을 둘러서서 절하는 꿈이었습니다(창 37:7). 또 하나는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창 37:9). 요셉이 꾼 꿈은 두 가지지만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그 꿈은 해몽이 필요 없을 만큼 명확했습니다.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와 형들이 그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단번에 알 정도였습니다(창 37:8, 10). 평상시에도 요셉을 싫어했던 형들은 그 꿈으로 인해 더욱 요셉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요셉은 열일곱 살 때(창 37:2) 형들의 시기로 애굽의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요셉이 팔려 간 것 같으나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를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시 105:17). 물론 요셉은 당시에 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창 45:5, 7).
요셉은 애굽 왕 바로의 친위 대장에게 팔려 그의 집에서 종살이했습니다(창 39:1). 하나님의 은혜로 가정 총무가 되었으나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습니다(시 105:18). 하지만 감옥은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었습니다. 그 감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는데, 어느 날 그곳에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이 죄를 짓고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친위 대장은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 들게 했습니다. 하루는 두 관원장이 꿈을 꾸었는데, 요셉이 그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요셉의 해몽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게 되었고, 떡 맡은 관원장은 처형을 당했습니다(창 40:22, 23).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복직하게 되면 자기를 감옥에서 내보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창 40:14). 하지만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의 부탁을 잊어버렸고, 그로부터 2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요셉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 기간에 요셉은 아무 불평 없이 묵묵히 참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보여주신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의 말처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시킨 것입니다(시 105:19). 그리고 그 믿음대로 요셉의 꿈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게 되었고, 바로의 꿈을 해석하여 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창 41:4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삭은 온유함으로 이웃과의 갈등을 비교적 잘 해결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장자권 문제로 형과 갈등을 겪으며 험난한 인생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요셉 역시 꿈으로 인해 고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삭의 온유함도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이고, 야곱과 요셉은 믿음으로 어려운 일들을 극복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그리고 자신들에게 하신 언약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가나안 땅과 그 후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이었으나 그 약속의 성취는 보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이뤄주실 거라는 믿음으로 일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고백했습니다(히 11:13). 그러한 고백은 자기들이 본향을 찾는 사람들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 돌아가기를 원했던 곳은 이 땅에 있는 본향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고향이었습니다(히 11:16). 우리도 언젠가는 하늘에 있는 본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날을 사모하며 나그네와 같은 인생을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