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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2024. 11. 10.
성경본문 보기

욥기 13장 1절 ~ 19절 [개역개정]

1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깨달았느니라
2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니라
3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4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 없는 의원이니라
5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6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7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여 속임을 말하려느냐
8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따르려느냐 그를 위하여 변론하려느냐
9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 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10 만일 너희가 몰래 낯을 따를진대 그가 반드시 책망하시리니
11 그의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의 두려움이 너희 위에 임하지 않겠느냐
12 너희의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가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
13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닥치든지 내가 당하리라
14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15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16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17 너희들은 내 말을 분명히 들으라 내가 너희 귀에 알려 줄 것이 있느니라
18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정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
19 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

 

설교문 보기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은 오히려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 있는 자라고 생각하며 욥이 왜 고난을 받고 있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충고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충고는 욥의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줄기차게 그 논리를 자신에게 적용하며 비난하는 친구들에게 욥은 화가 났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마치 자기들에게만 지혜가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너희가 아는 것은 나도 알고 있으니 내가 너희보다 못하지 않다”라고 하면서(욥 13:2) 그들을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쓸모없는 의원’에 비유했습니다(욥 13:4).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란 원문대로 직역하면 ‘거짓으로 바르는 자’ 혹은 ‘거짓을 회칠하는 자'입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구절이 에스겔 13장 10절입니다.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어떤 사람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여기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본 게 없이 자기 마음과 생각대로 예언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백성을 미혹했습니다(겔 13:7). 그들은 마치 황무지에 사는 여우와 같은 존재들입니다(겔 13:4). 이스라엘에서 여우는 교활함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짐승입니다. 예수님께서 헤롯 안디바를 여우에 빗대신 것도 그가 매우 교활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눅 13:32). 여우는 주로 사막이나 광야 같은 황무지에 서식하면서 곤충이나 들쥐 등 몸집이 작은 동물뿐만 아니라 곡식이나 과일 등 식물도 먹는 잡식성입니다. 과일 중에서는 포도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합니다. 여우는 포도뿐만 아니라 포도원 담장 밑에 서식하는 들쥐를 잡기 위해 포도원을 온통 헤집고 다닙니다. 그러면 그해 포도 농사는 망치고 맙니다(아 2:15). 이런 여우가 유대인들에게 달가울 리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바로 그와 존재였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누구보다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는 것처럼 말은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이 무너졌는데도 그곳에 올라가지 않았고,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지도 않았습니다(겔 13:5).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했음에도 그들을 책망하거나 바로잡기 위해 애를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평안이 없는데도 평안이 있다고 속이면서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습니다(겔 13:16). 그래야 백성들에게 환심을 사고 그를 빌미로 이익을 챙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겔 13:19). 그들의 행위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성벽을 허술하게 쌓아도 겉에 회칠을 해서 튼튼하게 보이게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겔 13:10). 이런 자들이 바로 ‘거짓을 회칠하는 자들' 즉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들’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에 대해서 한 말은 대부분 욥의 상황과 맞지 않는 거짓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그들 나름의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충고를 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거짓말이 되었습니다. 욥의 말대로 차라리 잠잠했더라면 지혜로운 자로 인정받았을지 모릅니다(욥 13:5). 잠언 기자는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라고 했습니다(잠 17:28).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라는 말처럼 모르면 조용히 있어야 합니다. 모르면서 아는 척했다가는 자신의 무지함만 드러날 뿐입니다.

그리고 욥은 그의 친구들을 ‘쓸모없는 의원’에 비유했습니다(욥 13:4b). 그들이 돌팔이 의사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돌팔이’란 제대로 지식이나 기술이 없으면서도 전문가 행세를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가 고난 받는 원인을 잘못 진단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인에게는 복을 주시고 악인은 벌하시는 분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이는 마치 코끼리의 한 부분만을 만지고서는 그것이 코끼리라고 우기는 시각장애인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렇듯 진단이 잘못되었는데 그 처방이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욥에게 있어서 그들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고 오히려 피해를 주는 돌팔이 의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또 욥은 친구들의 충고를 ‘재 같은 속담’이라고 했습니다(욥 13:12a). ‘재’란 ‘불에 타고 남는 가루’를 말하는데, 비유적으로는 무가치함을 의미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말하는 건 아무 데도 쓸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그들이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라고도 했습니다(욥 13:b). ‘토성’은 흙으로 쌓은 성으로, 그들의 논리가 쉽게 무너지는 흙더미에 불과하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한 말입니다. 욥은 아무런 가치가 없고 쉽게 무너지는 그런 논리를 펴고 있는 친구들에게 이제는 제발 입 좀 다물고, 자신을 내버려 두라고 호소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은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말합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는 입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교만하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친구들의 충고는 잘못된 판단에 근거한 것이므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교만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습니다. 친구들의 말에 일일이 반론하지 않고 그냥 침묵으로 일관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상황에서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악한 일을 하신 적도 없고, 거짓을 말한 적도 없으셨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분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사 53:6, 9).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악을 홀로 짊어진 채 모진 학대와 고문을 당하셨지만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고, 털을 깎이는 양과 같이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사 53:7 ; 마 27:12-14).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아셨기에 묵묵히 순종하셨습니다(히 5:8). 그런 예수님의 태도를 욥에게 요구한다는 건 무리가 있습니다. 비록 욥이 대단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 역시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친구들에게 다시 한번 자신이 무죄하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욥은 비록 하나님께서 자기를 죽이신다 해도 그분을 신뢰할 것이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밝히길 바랐습니다. 죽을 땐 죽더라도 하나님께 자신이 결백하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구원을 얻는 길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경건하지 않은 자 곧 사악한 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지만(욥 13:16) 자신은 의로우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또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욥은 자신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정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욥 13:18)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만일 자신과 변론하여 자기 죄를 입증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했습니다(욥 13:19). 어떤 누구도 자신의 죄를 드러낼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표현입니다. 그만큼 욥은 자신에게 죄가 없음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다가 갑자기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자기를 구원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두 가지 일만 하지 말아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실 것이니이다”(욥 13:21) 거리낌이 없이 말할 수 있도록 자신에게 내려진 징계를 거두어 달라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고통이 심하고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면 제대로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불러 주시면 대답하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자기가 먼저 말씀드리게 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응답해 주실 것을 요청했습니다(욥 13:2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욥은 따지듯 물었습니다.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욥 13:23)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길래 이토록 심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알려 주시라는 탄식 섞인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이어지는 기도는 더욱 애절했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욥 13:24)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진노(시 34:16 ; 벧전 3:12)와 은혜(시 27:9; 105:4)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뜻하는데,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신다는 건 상대를 멀리하시거나 적대하신다는 의미입니다(사 54:8). 그래서 욥은 왜 자신을 원수같이 취급하시냐고 한 것입니다. 그의 탄식은 계속되었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라게 하시며 마른 검불을 뒤쫓으시나이까”(욥 13:25) 낙엽같이 연약하고 마른 검불 곧 마른 나뭇가지나 지푸라기처럼 하찮고 무능한 자신을 왜 그토록 집요하게 쫓아다니시며 추궁하시는지 따져 묻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메시지(The Message, Eugene H. Petersonw 著)’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주께서는)어찌하여 나를 낡은 깡통처럼 걷어차십니까? 어찌하여 죽은 말에 채찍질을 하십니까?”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괴로운 일들 즉 욥이 저지른 잘못들을 모두 기록하시고, 그가 젊은 시절에 지은 죄까지 책임을 물으신다고 불평했습니다.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내가 받게 하시오며”(욥 13:26) 그동안 욥은 줄곧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해 왔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아무 흠도 없는 완전한 존재라고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제아무리 의롭다 해도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시 14:3 ; 전 7:20 ; 롬 3:10). 욥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이 만일 죄의 결과라면 분명 젊었을 때 지은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전의 일입니다. 그런 죄까지 들추어내서 책임을 물으시고 징계하시는 것은 너무 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욥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진실하고 정직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욥 1:1, 8 ; 2:3). 욥은 자신뿐 아니라 자녀들도 죄에 빠지지 않고 경건한 삶을 살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생일이 지나면 그들을 불러서 성결하게 하고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습니다. 혹시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라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죄를 지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욥 1:5). 그런 욥이 과거에 지은 자신의 죄들을 회개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26절을 ‘이미 회개하여 잊어버린 그의 젊었을 때의 죄’라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용서하신 죄를 영원히 잊어버리십니다(사 43:25; 미 7:19). 그러므로 이미 용서하신 죄를 다시 기억하시고 소급 적용하여 처벌하시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을 받은 자들(행 2:38)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히 10: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은 육체적 질병으로 인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고, 돌팔이 의사 같은 친구들로 인해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러나 욥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절망감에 ‘주께서 자기에게 얼굴을 가리시고 자신을 주의 원수로 여기셨다’며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롬 11:2). 어떻게 여자가 젖 먹는 자식을 잊을 수 있으며 자기가 낳은 아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잊는다 해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사 49:15).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절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자비하시고 긍휼히 많으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해야 합니다. 그런 자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