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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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5장 1절 ~ 11절 [개역개정]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설교문 보기
1차 선교여행을 마친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 돌아와 사역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이 유대에서 내려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가르쳤습니다(행 15:1). 모세의 법이란 율법을 말하는데, 율법은 보통 헬라어로 노모스(νόμος)라고 합니다(요 7:23). 그런데 본문에서는 관습이나 풍속을 의미하는 에도스(ἔθος)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관습이나 풍속은 시대와 환경 혹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변하지 않고 변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진리는 만고불변(萬古不變)이라 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입니다. 전통과 관습 그리고 철학과 이념 등은 시대와 장소 그리고 종족이나 개인의 성향에 따라 각각 다르고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할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할례는 모세에 의해 법으로 제정되었으나 실은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 때부터 행해져 오던 유대인의 관습이었습니다(요 7:22). 본래 할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나타내는 표시로서 행해진 것입니다(창 17:10, 11). 그래서 이스라엘 남자들은 모두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만일 할례를 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것이므로 이스라엘 백성에서 제외되었습니다(창 17:14). 반면에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할례를 받으면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출 12:48). 유대인 사회에서는 할례 받지 않은 자(삿 14:3) 곧 무할례자를 경멸했으며 그들과의 교제를 일절 금했습니다(행 11:3). 이처럼 할례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의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금하는 안식일에도 할례만은 시행되었습니다(요 7:23). 지금도 유대인 사회에서는 여전히 할례가 중요한 종교의식으로 치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할례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만 행해진 게 아닙니다. 의미는 다르지만 에돔과 모압 그리고 암몬 등 셈족 계열의 사회에서 널리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할례를 행하는 민족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풍습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자인 누가는 이 사실을 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모스가 아닌 에도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유대인들은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동시에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할례는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할례는 구별의 표시이지 구원의 증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할례를 받는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니고 받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 가운데는 여전히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이 많았습니다(행 21:20). 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여전히 지켜야 할 규례였고,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 일부가 안디옥에 내려와 구원에 있어서 할례는 필수 조건이므로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이방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하더라도 ‘모세의 법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과는 다른 이유로 육체의 할례를 고집하고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박해를 피하려는 자들이었습니다(갈 6:12). 만약 그들이 할례를 부인한다면 그로 인해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십자가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박해를 면하기 위해 육체의 할례를 강요한다면 그것은 결국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들이 어떤 이유로 할례를 고집하고 강요하든 그것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할례의식 같은 율법을 통해서 얻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울과 바나바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공통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다른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했습니다. 아마도 유대에서 내려온 자들이 자신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시를 받아서 왔다고 주장한 것 같습니다. 정말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을 해야 했고, 또 정식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지침을 받기 위해 사람들을 파송한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전송을 받고 떠난 바울 일행은 베니게와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가면서 그곳 신자들에게 이방인들이 회심한 일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들 역시 이방인이므로 이 소식을 듣고는 무척이나 기뻐했습니다(행 15:3).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행하신 일들을 모두 보고하였습니다. 바울 일행은 자신들의 사역을 하나님께서 함께 행하신 일이라고 말함으로써 이방인의 선교가 하나님의 뜻이며, 이를 반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때 바리새파 중에 믿는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이 1절에 언급된 ‘어떤 사람들’을 안디옥에 보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할례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표로 할례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 총회가 열렸습니다(행 15:6). 이는 성령 강림 후 기독교 공동체인 교회가 세워진 이래 최초로 열리는 종교 회의였습니다. 회의는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이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베드로를 택하셨습니다(행 15:7). 그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최초의 사도이기도 합니다(행 10장). 물론 이방인에게 최초로 복음을 전한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그는 일곱 집사 가운데 하나인 빌립입니다(행 8장). 복음은 유대인만의 전유물이 아닌 이방인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셨습니다(행 15:8). 대표적인 예가 고넬료 가정의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행 10:44). 성령의 임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행 2:38 ; 8:20). 그러한 선물을 이방인들에게도 주셨다는 것은 복음이 유대인들만을 위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행 15:9).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행 15:11 ; 엡 1:6 ; 2:8). 그러므로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요 3:16). 이 외에 죄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그가 누구든지 즉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모두 구원을 얻습니다(롬 10:13).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에는 결코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행 15:9, 11 ; 롬 3:2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를 요구하신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성민으로서의 거룩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신 10:12-16). 만일 그런 삶을 살지 못한다면 육체의 할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롬 2:25). 그래서 진정한 할례는 육체에 행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 하는 것입니다(롬 2:29). 이처럼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헌신과 구별의 표시이지 구원의 증표는 아닙니다. 즉 할례의 여부는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세례를 통하여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례는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세례는 예수님의 명령으로(마 28:19) 복음이 먼저 선포되고,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베풀어졌습니다(막 16:16 ; 행 2:41 ; 8:12). 이것은 세례가 믿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즉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행 2:38) 구원을 얻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명하는 예식이며 동시에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믿음을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선포하는 의식입니다.
바울은 세례에 대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과 합하는 것’이라고 했는데(롬 6:3, 4), 이는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골 3:9). 동시에 새로운 생명을 소유하게 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롬 6:4, 11).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은 죄악 된 옛 생활을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갈 2:20 ; 고전 10:31). 이는 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죄악 된 생활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백성이 되겠다는 상징적 의식입니다. 그러기에 할례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겠다는 마음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진정한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렘 4:4).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단지 구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엡 2:10).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하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고전 10:31).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제일 된 목적이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