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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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 14장 16절 ~ 21절 [개역개정]
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17 땅에 있는 족속들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18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19 애굽 사람이나 이방 나라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가 받을 벌이 그러하니라
20 그 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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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절기는 크게 봄 절기와 가을 절기로 나뉩니다. 봄에 지키는 절기로는 유월절과 무교절 그리고 초실절과 맥추절이 있습니다. 이 절기들은 유대력으로 1월에서 3월, 태양력으로는 3월에서 6월경에 지키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가을에 지키는 절기는 나팔절과 속죄일 그리고 수장절로 모두 7월에 있습니다. 태양력으로는 9월에서 10월 사이에 지키는 절기입니다. 수장절은 7월 15일부터 일주일간 지키는 절기로(레 23:34) 한 해의 농사를 마치고 수확한 것을 저장한 후에 지내는 감사의 절기였습니다(출 23:16 ; 신 16:13). 이 기간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비롯해 여러 무성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지내야 했기 때문에 초막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레 23:40). 이렇게 수장절 동안 초막에서 생활했던 이유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천막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정상적이라면 2년이 채 안 되어 들어갈 수 있었으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38년을 더 광야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광야는 생활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구할 수 없는 반면에 위험 요소가 너무 많은 곳입니다. 곳곳에 맹독을 가진 독사와 전갈이 득실거리고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은 구할 수도 없습니다(신 8:15). 또 낮에는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욘 4:8) 밤에는 한기가 들 정도로 춥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이백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40년을 지냈다는 것은 기적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 기적을 행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40년 동안 만나를 주셔서 굶주리지 않게 하셨고, 마실 물을 주시어 목마르지 않도록 하셨습니다(신 8:15, 16). 또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뜨거운 햇빛과 열기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셨으며, 밤에는 불기둥으로 추위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해어진 옷을 입지 않게 하셨고, 발이 부르트지 않도록 제때 신발을 공급해 주셨습니다(신 8:4 ; 느 9:21). 이렇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은 넉넉지는 않았으나 기본적으로 생활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후에 비로소 만나를 주셨습니다(신 8:3a).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신 8:3b).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떡이나 빵은 그것을 대표하는 음식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은 그런 것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창 1:27 ; 9:6)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혼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는 사람의 생명이 음식으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양식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만나를 ‘신령한 음식’ 곧 ‘영적 음식’이라고 했습니다(고전 10:3). 이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예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메시아의 표적을 보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요구한 것이 ‘만나’와 같은 표적이었습니다(요 6:30, 31).
이스라엘 사람들은 만나를 모세가 하늘로부터 내려준 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만나는 모세가 아닌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그들에게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만나는 참 떡이 아닌 그것의 모형일 뿐입니다. 참 떡은 세상에 생명을 주시려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요 1:14)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요(요 6:35, 48) ‘참된 양식’이라고 하셨습니다(요 6:55a).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입니다(요 6:35a). 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을 것입니다(요 6:35b)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영적 목마름을 해소해 주시는 ‘신령한 음료’요(고전 10:4), ‘참된 음료’가 되시기 때문입니다(요 6:55b).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요한복음 7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초막절 중간쯤 되었을 때 성전으로 올라가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요 7:14). 그리고 명절 마지막 날이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 38)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요한은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초막절 마지막 날에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절기 의식과 연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을 강해할 때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초막절 일주일 동안 대제사장은 실로암 못에서 금으로 만든 항아리로 물을 길어다 수문을 통해 제사장의 뜰로 들어가서 제단에 부었습니다. 수문(水門)은 예루살렘의 여러 성문 가운데 하나로 물을 운반하는 통로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느 8:1). 이때 찬양대원들이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라고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에 제단의 남서쪽에 매일 새로운 버드나무 가지를 세워놓고 그 주위를 순례자들이 한 바퀴씩 돌면서 시편 118편 25편을 낭송했다고 합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불렀던 바로 그 시편입니다(마 21:9). 이러한 의식은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하는 초막절에 다음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일종의 기우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초막절 의식과 관련하여 영적 생수에 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받게 될 성령은 단순히 육체적 목마름을 해소해 주는 물이 아니라 영적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생명수 샘물이며(계 21:6) 이 생수를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요 7:37). 예수 그리스도께 나오는 자들은 결코 주리지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요 6:35). 즉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요 6:58).
또한 만나는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지중해 연안에 있는 국가들과 중동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주로 먹는 음식은 밀이나 보리로 만든 빵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그것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밀이나 보리뿐만 아니라 먹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만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주신 만나는 어떤 사람도 본 적이 없고 알지도 못하는 음식이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 만나를 ‘하늘 양식’(기 78:24), 혹은 ‘힘센 자의 떡’이라고 했습니다(시 78:25). ‘힘센 자’란 천사를 가리킵니다. 그렇다고 만나가 천사들이 먹는 음식은 아닙니다. 천사는 영이기 때문에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단지 만나가 천사들이 거주하는 하늘(마 22:30)에서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이 같은 명칭이 붙은 것뿐입니다. 그것이 광야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었습니다(민 11:6). 물론 메추라기를 먹기도 했으나 그것은 일시적으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만나와 메추라기가 매일 주어진 것처럼 나와 있습니다(13).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민수기 11장과 상충하는 부분이 여럿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하튼 만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방법이 아닌 특별한 방법으로도 사람을 먹이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로 염려하거나 그로 인해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신앙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만 바라고 그분께 나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주셨던 것처럼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마 6:33).
하나님께서는 이 만나 한 오멜 약 2리터를 항아리에 담아 대대로 보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40년의 광야 생활 동안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항상 기억토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출 16:32).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 만나는 그쳤습니다(수 5:12). 이제 가나안 땅의 소산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곳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짓지 않은 집들이 있었고, 그들이 파지 않은 우물이 있었으며, 그들이 심지 않은 포도원과 감람원도 있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서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과거 그들의 조상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아울러 그들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했습니다(신 6:10, 11). 이것이 수장절 기간에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생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으로 그때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을 치러 온 모든 민족 가운데서 살아남은 자들도 해마다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이게 될 거라는 예언입니다. 초막절은 여호와의 절기 가운데 마지막 절기로 세상 종말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면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만일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비가 내리지 않는 벌을 내릴 것이라고 했습니다(슥 14:17). 비가 오지 않으면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살 수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큰 재앙입니다. 이는 마지막까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자들 그리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자들이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살후 1:9).
또 그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고,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슥 14:20). ‘여호와께 성결’이란 문구는 대제사장이 관 위에 착용하는 패에 새겼던 것입니다(출 28:36). 그리고 솥은 제물을 삶기 위해 사용된 것이고, 제단 앞 주발은 희생제물의 피를 받거나 전제에 사용하는 기구입니다. 이들은 서로 극과 극이라고 할 정도로 차이가 있는데, 이 둘을 같은 수준에 놓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더 이상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든 것이 다 거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슥 14:21a). 그리고 그날에는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슥 14:21b). 가나안 사람이란 죄와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을 가리키는데(레 18:24),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면 죄와 저주가 완전히 제거되고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살전 3:13 : 계 2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딤후 3:2). 반면에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범사에 감사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살전 5:18). 이스라엘 백성은 어느 민족보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었으나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이 일상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범사가 불만이고 불평이었습니다. 우리도 생각해 보면 감사할 조건이 참 많음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도록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세상 종말이 가까울수록 더욱 감사할 수 있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