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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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5장 12절 ~ 21절 [개역개정]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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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할례 문제를 다루기 위해 열린 예루살렘 공회에서는 열띤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대해 교회에서 기둥 같은 지도자로 인정받는 베드로와 야고보가 차례대로 자신의 의견을 밝혔습니다. 베드로의 의견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살펴봤는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복음은 유대인만을 위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었습니다(행 15:9, 11).
베드로에 이어서 야고보가 자기 의견을 밝힙니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였던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마 10:2)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 10:3)가 아니라 예수님의 친동생인 야고보를 말합니다(막 6:3 ; 갈 1:19). 그는 처음에 형을 믿지 않았으나(요 7:5) 후에 예수님을 믿고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갈 2:9). 야고보는 먼저 베드로가 한 말이 선지자들의 말씀과 일치한다고 증언합니다. 그 가운데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행 15:16-18)
아모스가 선지자로 활동할 시기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동시에 안정과 번영을 누리던 때였습니다. 반면에 종교적으로는 매우 타락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또 그로 인해 어떤 형벌을 받게 될 것인지 아모스를 통해 예언하셨습니다. 먼저 유다가 지은 죄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암 2:4) 유다는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율법 곧 하나님의 명령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위입니다. 대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우상들에게 미혹되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이러한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암 2:5), 이 예언은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멸망함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왕하 25:9). 이스라엘의 죄악은 더 심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나(암 2:9-11) 그들은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악하고 더러운 죄들을 일삼았습니다(암 2:6-8). 그런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형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유다가 멸망하기 130여 년 전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왕하 17:6). 이후로 이스라엘은 여러 민족의 지배를 받았으며 예수님과 사도들이 활동할 당시에는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이렇게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부국강병을 이루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란 바로 그런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회복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9:11, 12) 이 약속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메시아 왕국 곧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이미 시작되었습니다(마 12:28). 다만 그 완성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동안 천국 복음은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행 1:8) 곧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입니다(마 24:14 ; 막 16:15). 이 복음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이든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아야 하고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별 없이 복음을 믿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모두 구원을 얻습니다.
야고보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겠다’라는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율법의 행위가 아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행 15:11 ; 엡 2:5).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율법을 강요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언급한 것처럼 율법은 유대인들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였습니다(행 15:10). 멍에란 무거운 짐을 실은 수레를 끌거나 밭을 갈도록 짐승의 목에 얹어 놓은 도구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율법은 마치 멍에처럼 유대인들에게는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습니다. 물론 율법 자체가 무거운 짐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입니다(롬 7:12). 그런데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613개 조항으로 된 율법에 장로들의 전통(마 15:2)을 추가해서 생활 전반에 적용토록 강요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 규례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성회로 모이라’는, 어떻게 보면 간단한 것이었습니다(레 23:3). 그러면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이를 정하기 위해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 일들을 정했습니다(Mishnah Sabbath 73a). 예를 들어, 안식일에는 이삭을 잘라먹을 수 없고(마 12:1, 2), 병을 고치는 일을 할 수 없으며(마 12:10), 심지어 옷에 묻은 얼룩을 제거하기 위해 물을 붓거나 뿌리는 것도 금지했습니다.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안식일에 운전도 안 하고,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으며, 전기 스위치를 켜고 끄는 것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을 다 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율법은 구원의 길인 동시에 그것을 지키지 않을 시 상당한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율법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러한 율법은 마치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던 것입니다(마 23:4). 이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영·육 간에 몹시 지쳐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가리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1:28). 율법을 통해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율법을 다 지키다가도 한 가지 계명을 어기면 율법 전체를 다 어긴 자가 됩니다(약 2:10). 그것도 항상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마 5:19).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시므로(빌 2:8)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온전히 이루셨습니다(롬 8:3, 4).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에게 완전한 순종 곧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지 못한 경우 그를 범법자로 정죄했고, 그런 자들은 모두 저주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갈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결국 모든 자가 저주 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해 주셨습니다(갈 3:13).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그분의 공로로 인하여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롬 3:26). 여기에 율법을 비롯하여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결론은 정해졌습니다. 야고보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더 이상 율법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들에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하는 게 좋겠다고 말합니다(행 15:20). 이런 것들은 당시 이방인의 관습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레 19:26-29) 이방인 개종자들 가운데는 여전히 그런 관습을 버리지 못한 자들이 있었습니다(고전 5:1).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모두 엄히 금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고 해도 이런 것들에 관해서는 여전히 거부감이 있었을 것입니다(행 21:20). 그런데도 이방인 신자들이 그런 관습을 버리지 않는다면 기독교 공동체는 혼란과 분열이 불가피합니다. 따라서 이방인 신자들과 유대인 신자들 사이의 진정한 일치를 위해서는 그것을 저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해야만 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가졌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처럼 어떤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혐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요소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다만 성경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과 같은 신앙의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결코 양보가 있을 수 없지만 형식 같은 비본질적인 것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그것을 고집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제안은 예루살렘 공회에서 그대로 채택되었습니다. 이에 공회는 대표들을 뽑아서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에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지도자로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였습니다. 이들이 가는 이유는 예루살렘 공회의 결의를 증언하고 안디옥 교회의 형편을 살피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안디옥에 도착한 후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달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자신들의 믿음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과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다소 혼란스럽던 교회가 안정을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부여된 네 가지 금기 사항 역시 별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 금기 사항들을 짐으로 여기지 않고,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로 받아들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은 율법과 같은 어떤 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의 유익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다툴 일도 없고 교회가 갈라질 일도 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 24) 신앙에 있어서 개인의 자유도 중요하나 그 자유는 공동체의 유익보다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곧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교회가 서로 하나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