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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2024.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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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9장 23절 ~ 29절 [개역개정]

23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28 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까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
29 너희는 칼을 두려워 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장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

 

설교문 보기

욥은 고통받고 있는 자신의 현 상황을 썩은 물건의 낡아짐과 좀먹은 의복에 비유했습니다(욥 13:28). 자신이 전혀 쓸모없는 무가치한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의 소망도 없어 보입니다. 언제 이 고통이 끝날지 과연 끝날 수는 있는지 모든 게 불투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시고 친구들의 비난은 그칠 줄을 모릅니다. 오히려 비난의 강도는 더 세졌습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욥을 간사한 자에 빗대어 말합니다.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좋아하는구나”(욥 15:5) ‘간사(奸詐)하다’라는 말은 성격이 교활하여 남을 잘 속인다는 의미입니다. 욥이 스스로 지혜로운 자라고 하지만 그가 변론하는 것을 들어 보면 다 쓸데없는 소리고(욥 15:2)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욥 15:3) 간사한 자들의 혀 같다는 것입니다. 또 엘리바스는 욥이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비난했습니다. “네가 아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깨달은 것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 중에는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 연로한 사람도 있고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느니라”(욥 15:9, 10) 욥의 친구들 가운데는 욥보다 나이가 많은 자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 더 지혜롭다고 여겼습니다(레 19:32). 오랜 인생의 경륜과 경험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욥은 그들의 권면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권면이 자신의 상황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엘리바스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욥이 인간의 죄성까지 부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욥 5:14) 죄성(罪性)이란 ‘죄를 지으려는 성향’을 말하는데,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부패한 성품 즉 본성적으로 죄를 지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알아서 거짓말을 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할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죄의 성향이 그렇게 만듭니다.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하나님께서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입니다(창 8:21). 그런 사람에게 죄의 결과를 물어 홍수 심판을 반복한다면 사람과 짐승과 땅은 잠시도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밧세바의 일로 나단 선지자를 보내 다윗을 책망하셨을 때 그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다윗은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으며 어머니가 자기를 잉태한 순간부터 죄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본성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전 7:20 ; 롬 3:23). 중국의 맹자(孟子)는 사람의 본성이 선천적으로 착하다고 보았고(성선설), 반면에 순자(荀子)는 인간의 성품이 본래부터 악하다고 보았는데(성악설), 순자의 사상이 성경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욥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습니다(욥 9:2). 다만 자신이 지금 고난 받는 이유가 죄 때문이 아니라고 변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라고 해도 자꾸 죄인으로 몰아가니 욥과 친구들의 대화는 비난전 양상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치고받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비난의 강도는 더 심해졌고, 심지어 도를 넘는 막말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욥 15:15, 16) ‘거룩한 자들’이란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욥 5:1). ‘하늘’은 그들이 거하는 처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이라도 믿지 않으시고 그분의 눈에는 하늘도 깨끗하지 못합니다(욥 4:18). 하물며 죄를 물 마시듯 하는 더럽고 추한 인간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결국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욥 15:21).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고 자신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 엘리바스의 주장입니다.

수아 사람 빌닷 역시 이전보다 더 강도 높게 욥을 비난했습니다. 아마도 욥이 자신과 친구들을 어리석은 짐승 취급하는 것에 대해 몹시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욥 12:7-9 ; 18:12). 그래서 욥을 악인에 빗대어 그가 받게 될 온갖 재앙을 열거합니다. 원수가 할법한 말들을 친구라는 것들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가까운 친구가 어느 순간 원수가 되는 경우를 종종 접하게 됩니다. 다윗의 친구 중에도 그런 자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병상에 누워 있을 때 그를 싫어했던 사람들은 다윗을 비난했으며 심지어 그가 죽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얻은 명성을 시기했고, 그래서 다윗이 죽으면 그의 명성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는 다윗과 같이 떡을 먹던 가까운 친구도 있었습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9) 이는 아히도벨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친구이자 그가 신뢰하던 참모였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킬 때 다윗을 배반하고 그의 편에 섰습니다(삼하 15:3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유다의 배신에 대해 사용하셨습니다.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요 13:18b) ‘발꿈치를 들었다’라는 표현은 말이 그 주인을 차버리고 도망하는 모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주인을 배신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인의 뒤통수를 치거나 그의 등에 칼을 꽂은 것입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친구에서 원수가 되어버렸습니다.

쑨중싱(孫中興)이라는 대만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가 쓴 「신뢰는 어떻게 사기가 되는가」(박소정 역, 서울 : 세종서적, 2024)라는 책이 얼마 전에 출간되었는데, 이 책에 대한 서평 중에 ‘가장 위험한 사기꾼은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았습니다(https://www.hankyung.com/article/202411227595i). 이 제목을 보는 순간 떠오른 건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사람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오늘은 친구였는데, 내일은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누구도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그분은 결코 변함이 없으십니다(약 1:17). 그러므로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그 하나님께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시 146:5).

욥은 자신을 비난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욥 16:2) 욥이 보기에 친구들은 자신을 위로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괴롭히는 자들이었습니다. 욥은 더 이상 헛된 소리를 하지 말라고 친구들을 책망하면서(욥 16:3) 대화의 대상을 하나님께로 돌립니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욥 16:19)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 주실 증인일 뿐만 아니라 중보자 곧 변호인이 되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의 보증인이 되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누구리이까”(욥 17:3) 자신의 보증이 되어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아무도 없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욥의 형편을 알아주겠습니까.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 판단하기 때문에 사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진실을 알고 계십니다. 욥은 그 하나님께 자신의 보증인이 되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욥은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라고 고백했습니다(욥 19:25). ‘대속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고엘’은 ‘무르다, 되찾다, 구속하다, 보복하다’라는 뜻을 가진 ‘가알’에서 유래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율법에 근거하여 어떤 사람에게 어려운 일이 생긴 경우 그 사람과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 일을 대신 해결해 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죽임을 당하면 그 사람과 가장 가까운 친족이 살해자를 찾아 복수할 수 있었는데 이 경우 ‘고엘’을 ‘복수할 자’(민 35:12) 혹은 ‘원수 갚는 자’(삼하 14:11)라 불렀습니다. 또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 기업을 다시 사주어야 했고(레 25:25, 26), 종으로 팔렸을 경우 속량 곧 몸값을 치르고 그를 되찾아와야 했습니다(레 25:47-49). 그리고 어떤 사람이 상속자가 없이 죽을 경우에는 그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미망인과 결혼해서 대를 잇도록 해야 했습니다. 보아스는 이 관습대로 룻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룻 4:10). 이처럼 ‘고엘’은 어려움을 당한 친족에게는 구속자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후에 이 단어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시 19:14 ; 잠 23:11 등).

 

욥은 구속자이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를 위해 언젠가 하나님께서 땅 위에 서실 것이며 그때 자신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욥이 말하는 구속자는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속량 하시기 위해 그 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우리의 ‘고엘’, 구속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벧전 2:9). 하나님의 것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만 합니다(고전 7: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음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헨델은 자신이 작곡한 오라토리오(oratorio, 聖歌劇) ‘메시아’ 제3부 ‘부활과 영생’ 부분의 곡 첫머리에 본문 25절을 인용했습니다. 찬송가 170장은 이 곡의 일부에 영국의 감리교 목사인 찰스 웨슬리가 가사를 붙여 만든 곡입니다. “내 주님은 살아 계셔 날 지켜주시니 그 큰 사랑 인하여 나 자유 얻었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나 친지 그리고 동료라 할지라도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려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기에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내 눈물을 흘린다”라고 고백했습니다(욥 16:20).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겪을 때 사람이 아닌 살아 계신 하나님께 호소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모든 형편과 사정 그리고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