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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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장 23절 ~ 28절 [개역개정]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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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의 선진으로 소개한 인물 가운데 아벨에서부터 요셉까지 살펴봤습니다. 이 시간에는 모세와 더불어 그의 부모의 믿음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먼저 모세가 태어날 당시 이스라엘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그 배경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을 때 야곱과 그의 가족 70여 명이 애굽으로 이주했습니다(창 46:27 ; 행 7:14). 그로부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스라엘 자손은 나름대로 평화로운 삶을 누리며 크게 번성했습니다(출 1:7). 하지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Thutmose I)이 애굽을 다스리게 되면서 이스라엘은 한순간에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더 많아지면 전쟁이 일어날 때 그들이 애굽의 대적들과 합세하여 자신들과 싸우고 애굽에서 떠나갈 것이라 여겼습니다(출 1:10).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된 노역을 시켜 그 수를 억제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억압받을수록 더욱 번성했습니다(출 1:12). 이에 애굽 왕은 산파들(십브라와 부아)로 하여금 해산을 도울 때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출 1:16).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산파들은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아이들을 살려두었습니다(출 1:17).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보다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합니다(마 10:28). 하나님을 경외한 산파들의 도움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 번성하자 바로는 또 다른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들이 태어나면 그를 나일강에 던지라는 것입니다(출 1:21). 한 마디로 물에 빠뜨려 죽이라는 명령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그를 석 달 동안 숨겼는데, 그 이유가 다소 황당해 보입니다. 모세가 잘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출 2:2). 언뜻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만일 모세가 못생겼다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도 ‘모세가 태어났을 때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겼다’라고 했습니다(히 11:23). 잘생겼다, 아름답다, 표현만 다르지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잘생긴 것(טוֹב, 토브)을 보았다’라는 말과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보이신 반응 즉 “보시기에 좋았더라(טוֹב, 토브)”(창 1:4, 10, 12, 18, 22, 25, 31)라는 말이 같은 문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스데반은 출애굽기 2장 2절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행 7:20) ‘그녀가 보니 잘생겼다’라는 말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웠다’라는 말로 바꾼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아이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 아이가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통해 무엇인가 큰일을 계획하고 계신다는 걸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모세를 석 달 동안 숨겼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로 만든 상자에 아이를 담아 나일 강가의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습니다. 그때 마침 바로의 딸(Hatshepsut)이 목욕하러 와서 갈대 상자를 발견하고는 그 상자를 열어보니 한 아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아이가 히브리 사람의 아이라는 걸 알았으나 그를 불쌍히 여기고 데려다가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모세라 지었는데, 그를 물에서 건져냈기 때문입니다(출 2:10). 그때부터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서 애굽의 학문을 다 배워서 말과 행동에 뛰어난 인물이 되었습니다(행 7:22).
모세는 나이 사십이 되었을 때,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났습니다(행 7:24). 그래서 어느 날 자기 민족이 있는 곳으로 갔다가 그들이 힘들게 노동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같은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애굽 사람에게 매를 맞는 걸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죽여 모래 속에 감추었습니다(출 2:12). 이러한 행동은 모세가 스스로 히브리 사람임을 자처한 것이며, 나아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히 11:24). 만일 그가 공주의 아들로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려 했다면 그런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는 공주의 아들로서 잠시 죄의 쾌락을 누리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했습니다(히 11:25). 죄악 된 세상의 부귀와 영화 그리고 명예와 권력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기꺼이 고난에 동참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였습니다(히 11:26).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분으로서(히 13:8) 신약 시대뿐만 아니라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과 늘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사 63:9).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모를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세가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히 13:26). ‘바라보다’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블레포(ἀποβλέπω)’는 ‘시선을 한 곳에만 고정하다’라는 의미로 미완료 시제가 사용되었습니다. 즉 모세는 다른데 시선을 돌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실 상만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 상은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상입니다(히 11:6). 히브리서 기자는 당시 고난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상을 소망하면서 기꺼이 고난에 동참하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인이 겪는 고난은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롬 8:18). 그러므로 우리는 이곳저곳 두리번거리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상을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어떤 고난도 잘 참고 견디어야 할 것입니다.
모세는 이튿날 다시 동족에게로 나갔다가 같은 히브리 사람끼리 싸우는 걸 보고 그들을 말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애굽 사람을 죽인 게 탄로 나자 모세는 두려워했습니다(출 2:14). 그는 바로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걸 알고는 애굽을 떠나 미디안으로 도망했습니다(출 2:15). 그곳에서 40년을 지낸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출 3:10)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고 애굽을 나오게 되는데, 그때는 처음과 달리 믿음으로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애굽을 떠났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분 곧 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하여 인내했기 때문입니다(히 11:27).
또 모세는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습니다(히 11:28). 이는 애굽에 내려졌던 마지막 재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는데, 그중에서 마지막은 바로의 장자를 비롯해 애굽의 모든 백성의 장자와 심지어 가축의 처음 태어난 것까지 모두 죽음에 이르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자손은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땅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아홉 가지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재앙은 애굽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재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셨는데, 그것은 어린양의 피를 집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입니다(출 12:7). 그러면 재앙이 그 집을 그냥 지나쳐 넘어갔기 때문에 죽음의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출 12:13). 하나님께서는 이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로 삼으라고 하셨는데(출 12:14), 이 절기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여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했습니다(히 11:28). 백성들 역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했습니다(출 12:28). 그 결과 이스라엘 자손은 마지막 재앙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죽음의 재앙은 세상 끝 날에 있을 영원한 죽음 곧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예표합니다. 이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어린양 되신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고전 5:7). 집 문설주와 인방에 뿌려진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죄인을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서 구원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히 9:14). 그러므로 누구든지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외에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행 4:1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인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유일한 길입니다(요 14: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기자는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고백했습니다(시 84:10). 문지기는 레위 지파의 고라 자손들이 맡은 직분으로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이나 찬양을 맡은 자들보다 낮은 직급으로 여겨지기 쉽습니다. 물론 그렇지는 않지만, 비록 그렇게 여겨진다 할지라도 악인의 집에서 왕처럼 지내는 것보다 하루를 살더라도 주의 성전에서 문지기로 있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시편 기자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그는 바로의 궁전에서 잠시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고난 받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죄악 된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기꺼이 고난에 동참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과 그분께서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잠시 낙을 누리는 것보다 기꺼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을 택합니다. 그들은 잠시 있다가 없어질 이 세상의 것들이 아닌 영원한 하늘의 것들을 소망하며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믿음의 조상들처럼 하나님께서 살아계심과 그분께서 상 주심을 바라보면서 신앙으로 인하여 당하는 어떤 고난도 잘 참고 견디어 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