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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2024. 12. 5.
성경본문 보기

사도행전 16장 6절 ~ 10절 [개역개정]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설교문 보기

이방인의 할례 문제로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으로 돌아와 그곳에 머물며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바울은 바나바에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한 곳으로 다시 가서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아보자”라고 했습니다(행 15:36). 이에 바나바는 자기의 조카(골 4:10)인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를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전에 마가 요한이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행 13:13). 그는 바울과 바나바의 수행원으로 1차 선교여행에 동참했습니다(행 13:5). 그런데 이들이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렀을 때, 마가는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왜 돌아갔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이방인 선교에 따른 여러 어려움을 견디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그런 마가를 데려가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는 심하게 다투었습니다(행 15:39). 이로 말미암아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헤어졌고, 각자의 노선을 걷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유야 어떻든 보기에 좋지는 않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둘 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동역자였으며, 교회의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면에서 본을 보여야 할 사람들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해 언성을 높이며 싸웠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랑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 교회의 문제들이 대부분 사랑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성내지 않는 것입니다(고전 13:5). ‘성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록쉬노(παροξύνω)’는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몹시 격분한 상태를 가리킵니다(행 17:16). 여기서 ‘파록쉬스모스(παροξυσμός)’라는 단어가 유래했는데, 이 단어가 바로 ‘심히 다투어’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격해서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심하게 다투었던 것입니다. 이는 바울과 바나바 역시 우리처럼 연약한 성정을 가진 사람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약 5:17).

바울과 바나바는 심하게 다툰 끝에 결국 서로 갈라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고향인 구브로(행 4:36)로 갔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두루 다니며 교회들을 굳세게 하였습니다(그림). 실라는 이방인의 할례 문제에 대해 예루살렘 공회에서 결의한 사항을 안디옥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함께 파견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행 15:22). 그는 바울처럼 헬라파 유대인으로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는데(행 16:37), 그의 로마식 이름은 ‘실루아노’입니다(고후 1:19).

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은 1차 때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안디옥을 출발한 바울 일행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을 거쳐 더베와 루스드라에 도착했습니다. 더베와 루스드라는 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도시로 이곳에는 비시디아의 안디옥과 이고니온도 포함됩니다. 바울이 이곳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이 갈라디아서입니다(갈 1:2). 루스드라에는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1차 선교여행 때 회심한 것으로 보이며(행 14:6-20), 바울이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칭찬받을 정도로 신실한 제자가 되어 있었습니다(행 16:2). 바울은 그런 디모데를 선교여행에 합류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했습니다(행 16:3). 디모데가 그동안 할례를 받지 않았던 것은 그가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고, 아버지는 헬라 사람이었습니다(행 16:1). 오늘날 유대 사회에서는 어머니가 유대인일 경우 그 자녀는 유대인으로 인정받습니다. 하지만 바울 당시에는 아버지가 유대인일 경우에만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디모데는 이방인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걸 반대했고, 예루살렘 공회에서도 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디도에게는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갈 2:3). 그런데 왜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행했던 것일까요? 그에 대한 답은 3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행 16:3)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디모데의 아버지가 헬라 사람 곧 이방인이라는 것과 디모데가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을 부정한 자로 간주했고 그들과 접촉하는 걸 꺼렸습니다(행 11:3). 그런 유대인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도록 한 것입니다. 즉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서가 아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할례가 행해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20, 21) 바울은 때론 유대인처럼 때론 이방인처럼 행동했습니다(행 21:24 ; 고후 11:22). 그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을 얻게 하려고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고전 9:22). 할례처럼 복음이 아닌 것들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고, 때론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디모데는 할례를 받고 바울의 선교여행에 동참했습니다.

바울 일행은 갈라디아 지방의 여러 도시를 다니며 예루살렘 공회에서 정한 규례들을 주어 지키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들은 믿음 안에서 더욱 굳건해지고 그 수도 날마다 늘어났습니다(행 16:4, 5). 이어서 바울 일행은 아시아로 가서 말씀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아시아는 오늘날의 아시아 대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로마제국의 관할 아래 있는 소아시아 지방을 가리키는 것으로 지금의 튀르키예 서부지역입니다. 이 지방에는 에베소를 비롯해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골로새 등의 도시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왜 막으셨는지 또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바울 일행은 성령의 지시에 따랐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정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잠 16:9). 그러므로 사람의 계획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물을 필요도 없고 따져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그냥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아시아로 가려는 계획을 수정하여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거쳐 무시아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비두니아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예수의 영 곧 성령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행 16:7). 그래서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 에게해(Aegean海) 동쪽 해안에 있는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밤에 어떤 사람이 ‘마게도냐로 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 간청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향 16:9). 이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들로 하여금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하신 것으로 확신하고 즉시 마게도냐로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행 16:10).

바울 일행은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로 곧장 갔다가 이튿날 네압볼리를 거쳐 빌립보로 갔습니다. 이곳은 마게도냐 지방의 첫 도시로 로마의 식민지였으며, 마게도냐에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습니다. 바울 일행은 그곳에서 며칠 머물다 안식일이 되어 기도할 곳을 찾기 위해 성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빌립보에는 유대인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회당이 없었습니다. 회당이 만들어지려면 적어도 유대인 성인 남자 10명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회당이 없는 곳에는 강가나 해변에 기도하는 장소를 만들고 그곳에 함께 모여 기도했습니다. 바울 일행은 성문 밖 강가로 나가서 유대인들의 기도처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한 무리의 여인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들 중에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빌립보에 거주하면서 고향인 두아디라의 자색 옷감을 수입해 파는 자색 옷감 장수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루디아는 바울이 전하는 말을 귀담아들었는데, 이는 주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여셨기 때문입니다(행 16:14). 그녀는 예수님을 영접했으며, 그 식구들까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습니다. 루디아는 온 식구와 더불어 세례를 받고는 바울 일행을 강권하여 자기 집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바울 일행 루디아의 집에 머물면서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자 하나를 만났습니다. 이 여자는 점으로 자기 주인들에게 많은 돈을 벌어주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바울 일행을 보고 그들을 따라오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고 있다”라고 외쳤습니다(행 16:17). 어떻게 점하는 귀신 들린 여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을까요? 귀신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일을 하는데 말입니다(막 4:15). 여기에 마귀의 교묘한 속임수가 있습니다. 귀신 들린 여자는 바울 일행이 ‘하나님의 종들로서 구원의 길을 전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유대의 랍비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들 역시 나름대로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 일행은 구원의 유일한 ‘그 길’이신 예수를 전했으나 귀신은 ‘그(예수)’를 빼버리고 단지 어떤 구원의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빠진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을 얻는 여러 길 중 하나가 아닌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요 14: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구원 얻을 수가 없습니다(행 16:31).

바울은 처음에 그 여자를 내버려 두었습니다.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 날을 따라다니며 소란을 피우자 참다못한 바울이 그 안에 있는 귀신에게 소리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행 16:18). 그러자 귀신이 즉시 그녀에게서 나오게 되었고, 이로써 바울은 사람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종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세에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이 교묘한 말로 사람들을 속이고(골 2:4) 진리를 왜곡시켜서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하려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교묘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진리 위에 굳게 서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말씀을 가까이하고 항상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에 한눈팔지 말고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고 신앙에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