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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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4장 1절 ~ 11절 [개역개정]
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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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대림(待臨)이란 ‘오심을 기다린다’라는 뜻으로, 대강절(待降節) 또는 강림절(降臨節)이라고도 합니다. 기간은 성탄절 전의 4주간이며, 그리스도의 탄생에 앞서 그의 오심을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하기 위한 절기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는 이천 년 전 이미 세상에 오셨으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는지 그 의미를 되새기는 한편,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의 오심에 관한 예언이 많이 나오는데, 최초의 예언이 창세기 3장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은 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기원에 관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을 때는 죄가 없었습니다(창 1:31).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롬 5:12). 하나님의 명령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라는 것이었는데, 이를 어길 경우 반드시 죽을 것이라 경고하셨습니다(창 2:17).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그것을 먹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이용하여 마귀의 유혹을 단호히 거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잘못된 선택을 했고, 이는 인류의 가장 큰 비극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로 인해 죽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롬 5:12).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먹은 후에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그동안 벌거벗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었는데(창 2:25) 그 열매를 먹은 후에 비로소 벌거벗음에 대한 수치심을 느끼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들어 몸을 가렸습니다(창 3:7). 이는 영적으로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다고 죄가 덮어지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건 더더욱 아닙니다. 죄는 사람이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의 대가가 죽음이기에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 흘림 즉 희생이 필요했습니다(히 9: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짐승을 잡아[희생] 그 가죽으로 아담과 하와를 위해 옷을 지어 주셨습니다(창 3:21). 어떤 짐승의 가죽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호 2:9). 그리고 이 짐승은 사람의 죄로 인한 첫 희생제물로 장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희생제물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롬 4:25).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후 느낀 감정은 수치심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느꼈던 또 하나의 감정은 두려움이었습니다(창 3:10). 아담과 하와는 그날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서 나무 사이로 숨었습니다. 그런 아담을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신 이유는 그가 어디에 숨었는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자기 잘못을 자백하기는커녕 오히려 변명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책임을 아내인 하와에게 전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라고 주신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주기에 먹었다는 것입니다(창 3:12). 이 말속에는 하나님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는 뉘앙스가 담겨있습니다. 하와를 가리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하와를 주신 것에 도리어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와 역시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그 책임을 뱀에게 떠넘겼습니다. 뱀이 자신을 속여서 그것을 먹었다는 것입니다(창 3:13).
이렇듯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책임을 모면하기에 급급했던 아담과 하와에게 형벌은 불가피했습니다(창 3:16-19). 하와를 유혹했던 뱀도 저주를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뱀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짐승 중에서 가장 간교했고(창 3:1), 사람과의 소통도 가능했습니다(창 3:1-5).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렇게 만드셨는지 아니면 사탄이 뱀을 통해 말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이 죄를 짓는데 사탄이 관여했다는 사실입니다(고후 11:3). 사도 요한은 이 뱀을 가리켜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했습니다(계 12:9 ; 20:2). 그렇다고 뱀이 마귀나 사탄은 아닙니다. 분명 뱀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드신 들짐승으로서(창 2:19 ; 3:1) 단지 사탄의 도구로 이용되었을 뿐입니다. 뱀에게 내려진 저주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창 3:14) 이로 보건대 뱀의 원래 모습은 오늘날의 모습과는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뱀이 다른 동물들처럼 걸을 수 있는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어서 또 다른 형벌이 내려졌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이는 뱀을 이용해 하와를 유혹한 사탄에게 내려진 저주로 예수님에 관한 최초의 예언이자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원시복음(原始福音)’ 즉 ‘최초의 복음’이라 부릅니다. ‘여자의 후손’이란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갈 3:16, 19). 이사야 선지자도 이에 대해 예언한 바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비록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히 4:15).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선포했습니다(시 14:1-3 ; 롬 3:10, 23). 만일 예수님께서 일반적인 방법을 통해 태어나셨다면 그 역시 죄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죄에서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주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동정녀 탄생입니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은 사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를 예표 합니다(요일 3:8). 반면에 뱀이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가리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나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히 2:14). 이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일평생 사탄의 종으로 살아야만 했던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렸습니다(히 2: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요 3:16 ; 6:40).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 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갈 4:4). 헬라어에는 ‘때(시간)’를 가리키는 단어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역사적 혹은 일반적인 시간을 말하는 ‘크로노스(χρόνος)’이고, 또 하나는 정해진 시간이나 특정한 때를 가리키는 ‘카이로스(καιρός)’입니다(마 8:29 ; 막 1:15 ; 눅 20:10 ; 요 7:8 등). 그런데 4절에서 말하는 때는 카이로스가 아니라 크로노스 즉 일반적인 시간을 가리킵니다. 이 시간은 2절의 정한 때와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4절의 때가 찼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에 관한 최초의 예언이자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자기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갈 4:5).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란 세상의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롬 3:19).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롬 3:23) 그래서 모두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믿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 1:12).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하므로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물론 율법을 항상 그리고 온전히 지킬 수 있다면 가능합니다(레 18:5 ; 롬 10:5 ; 갈 3:10).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따라서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행 13:39 ; 갈 3:11). 다만 율법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고(롬 3:20), 그로 하여금 죄에서 돌이키게 하는 역할만 할 뿐입니다. 바울은 이를 ‘초등학문’이라고 말합니다(갈 4:3). ‘초등학문’이란 ‘어떤 분야에 있어서 초보 단계’를 의미하는 것으로(히 5:12), 바울은 유대인의 율법주의나 이방인의 우상숭배(갈 4:8)를 미련하고 어리석다는 점에서 초등학문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초등학문인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그 죄에서 돌이키게 할 뿐 그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 했고,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 중에도 그런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하고 할례 등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행 15:1).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갈라디아 교회에는 몰래 들어온 거짓 교사들(갈 2:4)의 잘못된 가르침에 넘어가 할례뿐만 아니라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갈 4:10). 사실 이러한 것들을 지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롬 14:5). 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그만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구원의 방편으로 행해진다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이를 ‘다른 복음’이라 규정합니다(갈 1:6). 말이 복음이지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정반대 되는 거짓 가르침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그 외에 다는 복음은 없습니다(갈 2:16). 이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그가 누구든 심지어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갈 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은 율법을 지키거나 양심(럼 2:15)에 거리낌 없이 산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만일 그런 행위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굳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어 고난과 멸시를 당하셨겠습니까? 이 외에는 죄인이 구원 얻을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도 피하고 싶은 고난의 잔이었습니다(막 14:36). 하지만 그것 외에 죄인을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잘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꺼이 그 잔을 마셨습니다(눅 22:42). 그로 말미암아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살 길이 열렸습니다(히 10:20).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 길'은 예수님이시며, 예수님 밖에는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요 14:6). 그리고 구원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율법도 양심도 우상도 그 어느 것도 죄인을 하나님께 인도하지는 못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그 외에 다는 복음은 없는 것입니다(갈 2:16).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합 2:4 ; 갈 3:11)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